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환 Aug 07. 2020

아버지의 필명을 쓰는 아들 이야기

필명을 쓰는 이유

"네가 쓴 거라고?"


브런치에 쓴 글을 종종 가족에게 보여준다.

필명으로 글을 쓴다고 분명히 아내에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글 링크를 메신저로 보냈더니 낯선 이름으로 작성된 것을 보고는 내게 물어온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쓴 글 보낸걸 다른 사람이 쓴 글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내가 말을 안 했는데 했다고 기억하는 것인지, 아내가 까먹은 것인지 중요하진 않지만 이참에 아버지의 필명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아버지는 노년엔 집안 소일거리를 하시거나 TV를 보지 않으실 때에는 주로 글을 쓰셨다.

오랜 기간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나 돌아가시기 전 정신과 체력이 조금이라도 따라줄 때에는 메모지나 노트에 글을 적으셨다.


아버지는 주로 사고(思考)에 관한 내용에 대해 글을 쓰셨다.

읽으신 책의 내용들을 요약하시기도 했고, 작가 중에서는 특히 에드워드 드 보노의 책을 많이 읽으셨다.

에드워드 드 보노는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수평형 사고(Lateral Thinking)>, <여섯 개의 사고 모자(Six Thinking Hats)>를 동명의 책을 씀과 동시에 창시한 사람이다.


적은 글은 나 또는 누나들에게 타이핑해서 출력해 오라고 하셨다. 출력된 원고를 보시고 교정할 내용을 체크하면 다시 출력해서 가져다 드리기를 반복하면서 원고를 완성해 나가셨다.

나중에 누나는 원고들을 묶어 제본해서 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 그 책은 정식 출간된 건 아니지만 아버지의 첫 책이자 유작이 되었다.

누나와 내 PC 곳곳에는 아버지가 쓰신 글들이 저장되어 유산처럼 남아 있다.

(절대 외우지 못할) 우리 집 가훈


아버지는 <사고력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제목으로 공백 제외, 괄호 한문 포함 글자 수 760자짜리 가훈도 직접 쓰셔서 자식들에게 남겨주셨다.

그 가훈을 쓰시면서 마지막 날짜와 이름에, 아버지께서 직접 작명하신 이름을 넣으셨다. 그 이름이 바로 내가 필명으로 쓰고 있는 '김민환'이다.




브런치 작가에 지원해서 선발된 다음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이 작가명이었다.

본명을 쓸지, 다른 곳에서 쓰고 있는 닉네임으로 쓸지 잠시 생각하다가 아버지가 가훈에 남기신 필명을 쓰기로 했다.

배우 조진웅씨가 아버지의 이름을 예명으로 쓰는 이유에 대해 인터뷰 때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생긴다고 했던 것 같다.

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가명을 쓰면 좀 더 정성 들여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아니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의 생각과 사고방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글도 아버지가 쓰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버지 필명을 쓰는 아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작가의 이전글 직장에서의 반말과 존댓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