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게으른 者의 휴가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친한 회사 형님과 동생, 이렇게 셋이서 저녁을 먹었다.
동생 : (여행 가서 음악 듣게)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 가져가세요.
나 : 노트북 가져갈 건데? 맥북 사운드가 웬만한 블루투스 스피커보다 훨씬 좋아.
동생 : 가서 일도 하시려고요? 가져가지 마세요! 쉬다가만 오세요!!
나 : 일은 절대 안 할 거고, 글도 쓰고 하려면 노트북은 있어야지.
형 : 그냥 노트랑 펜이나 챙겨가. 노트북은 가져가지 말고.
대략 이런 내용들의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발주사 계약 담당자 : 이번 달 내에 지급되게 하려면(돈 드리려면) 이번 주 중에 꼭 견적서를 보내 주셔야 합니다.
수행사 계약 담당자 : 다음 달에 주셔도 되는데, 꼭 이번 달에 안 주셔도 되는데...
발주사 계약 담당자 : 저희는 이번 연도 예산이라 이번 달에 꼭 드려야 해요.
수행사 계약 담당자 : 알겠습니다. ㅠ.ㅠ
직장 동료들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웬만큼 미룰 수 있는 일들은 다 미뤘는데, 동생이 작성한 견적서를 최종 검토하는 일은 마무리 못하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와서 일하는 것도 꿀꿀한데, 바다 보이는 카페에나 가서 일도 하고 책이나 읽다가 와야겠다.'
라고 생각하고는 숙소를 나섰는데, 마침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 상황은 이랬다.
'카페거리까지 가야 하는 건가?'
카페거리는 내가 있던 곳에서 한, 10~20분쯤 걸어가야 하는데, 가려면 왼쪽에 바다를 보면서 소나무 숲을 걸어야 한다.
어제저녁 때는 소나무 향기가 강했는데, 낮이라 그런지 오늘은 바다내음에 가려 소나무향이 거의 나지 않았다.
어제저녁 잠깐 산책 나왔을 때에도 느꼈지만 카페가 진짜 많다. 지도 서비스를 열어 재 보니 400미터도 넘는다. 그 길이의 해변가에 카페들이 빼곡히 차 있다.
'바다에 놨으면 바다를 볼 것이지 왜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바닷가 카페 중 적당한 곳을 찾았다.
여기는 전망이 너무 좋아서 비쌀 것 같고, 또 저기는 이미 창가 차리는 꽉 차있고, 저기는 커피가 맛이 없어 보이고, 등등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맘에 드는 카페를 찾지 못했고, 결국 선물 받은 카드 잔액이 남아 있는 별다방을 검색했다. 하필이면 카페거리 가장 끝 부분에 있었다.
"PM님은 별다방 닉네임이 뭐예요?"
"저는 'OO아빠'에요. OO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고요."
"정말요? 저는 우리 고양이 OO이름 따서 'OO엄마'인데, 둘 다 재미있네요."
작년부터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와 일 시작 초기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을 때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OO아빠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를 마치면, 견적서 파일을 열겠지.
아마도 우리 회사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강릉 안목항에서 보내지는 견적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