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런 건가 싶은 현존재
예전에 학교에 다니면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 말고는 "너는 이런 걸 공부 중이구나? 그런데 앞으로 뭐할 거야? 꿈이 뭐야?"라고 묻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거의 디폴트 질문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당시에 그 질문들에 많이 흔들렸고 불안했던 것 같다. 흘러가듯이 대학원에 왔지만, 대학원까지 와서 그 질문을 회피할 수도 없어서 힘들었다. 나만 챙기기도 벅찬데 모든 관계가 너무 큰 물음으로 다가왔다. 인생을 헛산게 아닐까 모든것이 힘겹게 다가왔던 때였다.
위축되지 않고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조금만 더 단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그 시기와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단단해질 수 있었긴 하지만, 그 시절이 어떻게든 계속해서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목적 없이 입학했던 내게 대학원에서의 가장 큰 과제는 내 가치의 증명이었고 또 그게 남들의 눈에도 크게 보이지 않았을까. 100%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독여주고 응원을 많이 해줬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야 와닿아서 이 글을 쓰게됐다.
*내 생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와 또 감사함을 잊지 않고 쭉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하기 시작했지만,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할지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합일이 잘 되지 않아 고민인 사람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추천받아 읽었던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철학 관련 서적을 함께 적어보았다.
추천한 책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첫 번째 책은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내게 낯선 곳으로 도전해야겠다는 동기부여와 용기를 심어준 책이었다. 두 번째 책은 내가 가진 직업에 대해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있던 생각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했던 책이다. 공통적으로 읽어도 좋을 다른 책과 달리 두 번째 책은 비판적 시야를 기르고 싶은 디자이너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세 번째 책은 내가 과연 세상에 나답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 물음을 주었던 책으로 세 권 모두 철학과 관련되어 있다.
다행히 내가 가장 위태로웠고 힘이 들었던 시기에 스스로 인생의 버팀목이 되는, 내 안의 무언가를 채울 수 있었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요즘 문득문득 그때에 열심히 포스트잇 붙여가며 읽었던 책들이 떠올라 뒤져보곤 하는데, 어른의 헤아림과 자상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왜 내게 여러 가지 책들을 소개해주셨고 알아보라고 하셨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든다. 태도나 표현이 아니라 학문적 교육을 전달해주셨던 것이어서, 지금 내게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있었고, 매번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생각해야해서 피로함도 있기도 했다. 괜한걸 강조하고 알려준게 아닐까 하하 웃으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달해주셨던 따뜻하고 다정한 어른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2년 전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니 기억이 세세하게 나지 않지만, 수업을 통해 예술과 디자인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쭉 훑어주셨고 교수님을 통해 하이데거를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와 관련된 개념이 많기도 하고 어려워서 제대로 된 개념서는 읽지 못하고 고이 모셔둔 상태고, 중학생 추천 도서로 읽기 쉽게 풀이된 탐 철학 소설의 29번, 황수아 님의 <하이데거, 어린 왕자를 만나다>를 읽었다. 이때 어린 왕자를 다시 읽게 되었고 감정이 북받쳐서 울기까지 했었다. 그 후에 북받쳤던 감정이 생각나 다시 읽어봐도 내가 그때 도대체 왜 울었더라? 하면서 아리송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내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뭘 모르고 있었는지, 뭘 못하고 있었는지 은연중에 깨달았던 게 아닐까 싶다.
이전에 브런치에 올린 회색지대 글을 보니 이 책이 생각났고, 그때 왜 내가 당시에 철학과 행복에 관한 책들을 찾아서 읽었는지도 알겠고,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도 그렇고 하이데거를 알려주신 것도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땐 뭐든 해내기에 벅차고 정신없었는데 그 이유가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고, 또 확신이 부족한 이유는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경험하기를 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업 디자인 분야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되었던 이유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분명 있었을 텐데 진짜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한 채로 해야만 한다며 힘들게 쥐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의 약한 연결이라는 책은 읽고 나서 주변에도 종종 이런 좋은 책이 있다고 이야기 했던 책으로 교수님께서 소논문을 지도해주시면서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다. 구글이 예측하지 못하는 새로운 검색어를 얻기 위해서는 현실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맥락의 책인데, 그건 당연한 말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사유의 과정으로 설득되어 감명이 있었다. (왜 때문인지는 다시 읽고 정리를 해봐야 될 것 같다.) 평범한 일상에서 어떻게 그런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었는지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엄~청! 재미있게 읽었고 두 번 정독했다. 지금 글을 쓰다 보니 느끼는 건데 두 번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다. 조만간 다시 읽고 그 울림이 있었던 문장들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여하튼 약한 연결은 핸드폰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가슴에 쾅! 낙인을 찍어주는 책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얼마 전에 유 퀴즈 채널에서 보게 된 김영하 작가님 편도 생각났다. 작품 구상법에 대한 이야기다. '절대 쓰지 않을' 이야기들의 목록에 대한 이야기인데, 해야 될 목록을 쓰다 보면 현실적인 제약이 붙기 마련이라 풍부해지기보다 제한될 때가 있다는 것을 통찰해 오히려 쓰지 않을 목록을 쓴다는 것이다.
나의 바운더리 밖으로 나가야지, 나를 비워야지 더 확장되는 무언가도 있는 법이다.
-교보 문고 제공한 책 소개글
구글이 예측할 수 없는 ‘말’을 손에 넣어라, 검색어를 내 것으로 만들라!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논객 아즈마 히로키의 새 책. 《존재론적, 우편적》《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일반의지 2.0》 등을 통해 현대 철학, 서브컬처(하위문화), 정보 환경을 논한 그는 이 책에서 ‘관광’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한다.
『약한 연결』은 강한 유대관계/약한 유대관계, 말/말이 아닌 것이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즈마는 인간을 익숙한 공간에 고정시켜 전형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강한 유대관계를 벗어나 우리에게 뜻밖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약한 유대관계’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관광’이 인생에 우연을 가져오는 계기, 통계적 전형성에 소음(노이즈)을 끼워 넣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아즈마에게 세상은 말과 말이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말로 구성된 세계의 대표로 인터넷을 들고 있다. 우리는 인터넷에 접속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검색하고, 자신이 의도한 정보를 축적해간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을 접하는 사람은 자기 언어에 갇힌 인간이 되고 만다. 아즈마는 우리에게 말이 아닌 것, 즉 언어 외부로 떠날 것을 요청한다.
우리의 몸을 미지의 환경에 두었을 때 새로운 욕망이 생기고, 그것이 새로운 검색어, 즉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아닌 ‘현실’에서 약한 유대관계와 우연한 만남을 찾는 것, 신체를 이동시켜 여행을 떠나는 것, 환경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것, 구글이 주는 검색어를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것. 아즈마 히로키가 최초의 도발적 인생론 『약한 연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미디어 철학자인 빌렘 플루서의 디자인의 작은 철학은 디자인을 그저 모든 걸 답습하기 바빴던 내게 여러 가지 관점에서 디자인을 바라볼 수 있게끔 사유의 시야를 넓혀준 책이다. 오래전 책이라 그런지 번역도 이상하고 배경지식이 없어 읽는 게 힘들었지만, 디자인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시각들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내겐 같이 수업을 들었던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더 격통 하는 주제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오래 전의 학자신데 언뜻 듣기만으로도 몇 세대 뒤의 미래를 통찰하신 분이라 놀랍기도 하고 사진, 영상 미디어에 작년부터 관심이 생겨서 매체에 대한 이론과 현상학에 관한 책들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이 책도 다시 한번 공부해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잠깐 펼쳐보니 좀 어지러웠다.)
-교보 문고 제공한 책 소개글
앞으로 모든 문제는 디자인과 결부된다는 생각을 가진 저자가 자신의 모든 텍스트를 공개하고 있다. 디자인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로 이 책과 같이 의미 있는 저작물이 탄생하게 되었다. 저자만의 디자인 인식법과 사물의 위치에 대한 생각, 구성물과 건물에 대한 사유 등 그의 머릿속에 있었던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세상에 소개되면서 하나의 작은 충격을 준다.
이 책은 주인공이 하이데거와 함께 B612 행성으로 가서 어린 왕자를 만나면서 가족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가치관이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소설인데 읽는 내내 주인공에 이입하여 하이데거의 철학을 배우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 다움에 대해 놓친 채로 살게 되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책의 주인공 역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채로 살다가 하이데거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 역시 지난 2년간 나다움을 잊어버린 채 살다가 요 근래 다시 나를 찾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168p.
하이데거는 여러 존재자 중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인 인간을 현존재라고 합니다. 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도록 처해있어요. 여기서 '존재함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현존재의 삶이 다른 사물이나 동물처럼 고정되어 있거나 본능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기획 투사(존재 가능을 향해 내던짐)하고 그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러한 현존재의 본질이 곧 실존입니다. '존재 물음의 가능성을 가진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삶의 태도'가 곧 실존이지요. 일상에서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곧 실존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9p.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향해 가는 존재인 한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불안은 평소에는 의식되지 않지만 우리 의식의 밑바닥에 항상 숨어 있지요. 언젠가는 죽는 존재인 인간이 무슨 이유로 이 세상에 던져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불안의 이유입니다. 불안이라는 기분은 죽음 앞에서 우리가 집착해 온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안을 통해 그동안 집착해 온 가치들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지요. 이렇게 유일무이하고 충만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은 중요한 감정이랍니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통해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 본래적 삶으로 향하게 되니까요.
171p.
8. 인간은 세계 속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인 거지요. 일상을 사는 인간은 '나는 왜 살지?', '어차피 죽는데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와 같은 불안을 통해 자신이 내던져졌음을 자각합니다. 불안에 맞닥뜨리면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의 현존재로서 가장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 기획 투사하는 존재로 자신을 열어 밝히지요. 이렇게 존재 가능을 향해 새롭게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기획 투사라고 합니다.
요즘 문화 기획자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무턱대고 도전해보는 중인데, 내가 관심 가져왔던 모든 것을 겨국 이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도전해보는 것. 현존재로서 기획 투사하는 존재로 나를 세상에 내던져 본다. 일상에서 다시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또다시 전파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특히 요 근래 스터디를 하면서 들었던 나의 생각과 작품들을 각각 노트 폴리오와 브런치에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이렇게 가다듬으니 빛바래져 가던 것들이 다시 뚜렷해지는 기분에 참 뿌듯하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나 자신을 한 차례 정리하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 같다. 스터디를 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소중한게 무엇인지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어떻게 밥을 벌어 먹고 살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어쨌든 소통을 통해 발전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또 그 깨달음을 환원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스터디를 하면서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눈다는 게 삶에 정말 큰 시너지를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내가 깨달은 것들을 잘 담아내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도전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내가 너무 작아 보일 때가 많아 먼저 연락도 잘 못하고 만나는 건 요즘 정신이 없어 더더욱 못해서 이렇게 혼자 글을 쓰지만 내 시간에 함께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
그동안에 모자라고 불안한 나를 잘 붙들어준 소중한 인연들에게 참 감사하다. 그 고마움에 대해 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항상 후회되고, 간혹 관계를 지속하면서 서운함이 있었던 적도 참 많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잊어버리면 될 일이었는데! 그냥 모른 척하면 될 일들에도 연연했기에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이데거를 처음 알게 되었던 마지막 수업에서 "그래~ 바로 그거야!" 하고 웃어주셨던 교수님의 모습도 요즘 참 많이 아른거린다. 잃은 게 더 많은 것만 같던 시절인 대학원 생활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교수님 덕분에 배우게 된 것들, 바뀐 삶의 태도들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어리둥절하면서 막연히 그냥 내가 하고 싶은걸 하자고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보다 더 뚜렷하게 내가 바라는 것을 찾아가면서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깨닫는다.
오늘을 또 잊지 않고 싶어 자지 않고 기록해야겠단 생각에 글을 썼고, 기록하면서 또 한 번 마음에 담았다. 할 일을 마치면 잠을 못 자도 개운해지고는 하는데, 오늘도 많이 늦게 자게 됐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게 잠에 들고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