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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푸른 Jul 27. 2020

책을 먹다, 생각을 읽다

'~다움의 폭력성'





사회가 만들어낸 이미지

'억압의 굴레'




Photo by Noah Buscher on Unsplash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나의 눈앞에는 '~다움'의 폭력성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옥죄고 있는 줄은 사회에서 만들어낸 이미지를 뜻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는 '장애인 다움', '여자다움', '남자다움', '학생 다움' 등 같은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도록 만든다. 사회에서 만들어낸 '~다움'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남자애가 울면 어떡하니! 남자답게 뚝 그쳐야지.' '그런 건 여자애들이나 갖고 노는 거야. 총이나 레고 같은 장난감이 낫지 않겠니?' '학생은 공부나 해야지. 다른 일 하는 건 시간 낭비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말에 반항하려 하지만 어느새 이미지에 끼워 맞춰 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성 소수자는 어떨까. 사회의 주를 이루고 있는 이성애자보다 편견에 시달리기 쉬울지도 모른다. '성 소수자 다움'에서 비롯한 견고한 장벽에 부딪혀 상처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 다움',

 이성애자의 시선




'성 소수자 다움'에 대한 고민은 한 책에서 비롯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소설이었다. 이 작품은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각각의 편에서 성 소수자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박상영 작가는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나는 이 중에서 제목과 일치하는 작품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은연중에 나를 지배하고 있는 시선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접하기 전, 성 소수자의 삶은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힘겨운 나날을 이어 나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 자체가 차별이자 '성 소수자 다움'에 갇힌 잣대였다. 나를 깨달음으로 이끈 것은 두 문장이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_『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문학동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

과 자이툰 파스타 편) p.180 중에서  

   



 "동성애자 캐릭터가 그렇게 발랄한 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게 어색한 것조차 모르잖아. 당신, 소재에 대해 제대로 고민한 게 맞긴 맞아?"     

_『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문학동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편), p.181~182 중에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성 소수자, 게이다. 인용한 글은 주인공이 영화 상영회 뒤풀이에 참석했을 때 나온 부분이다. 주인공은 여느 이성애자 커플과 같이 게이의 '평범한' 생활을 그린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어디에서도 주목받지 못했고, 지인 덕분에 조그만 영화제에서 겨우 상영할 수 있었다. 상영회에는 주인공과 같은 소재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주인공과 달리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수상까지 했다. 주인공이 의문을 가질 때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같은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상까지 받고, 다른 사람은 주목조차 받지 못했을까. 그것은 성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영화에는 '치명적인 지점'이 없었고, 다른 이의 작품에는 그것이 있었다. 치명적인 '지점'은 철저히 이성애자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른 이가 만든 작품은 실제 성 소수자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극적이며 영화를 보는 사람들(주로 이성애자)의 눈물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당사자인 성 소수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주인공도 영화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영화에 나온 성 소수자의 모습은 이성애자의 '판타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뒤풀이에서 주인공의 작품을 향한 평론가의 의견은 이를 잘 보여주었다. 동성애자는 발랄해서도, 평범해서도 안 되었다. 사랑을 나누는 자유가 제한되며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고뇌에 차 있는 모습이 동성애자들이라고 평론가는 말하고 있었다. 동성애자들이 사랑을 이루는 과정도 이성애자보다 지난하리라는 생각을 드러냈다. 나도 이러한 시선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었다. 성 소수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상처 투성이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은 '성 소수자 다움'이란 단단한 벽이 원인이었다. 




사랑하는 이들끼리 손을 잡는 것은 너무도 평범한 일이다. 성 소수자들은 이러한 평범한 것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_Photo by Caleb Ekeroth on Unsplash

           






평범함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다움'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이미지였다. 이미지는 성 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두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작품은 나를 또 다른 생각으로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성 소수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조심스레 답을 내놓았다. 성 소수자는 어쩌면 평범함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똑같은, 평범한 존재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성 소수자들은 이성애자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다워야 한다'는 시선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는 성 소수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본다. '~다움'의 무자비함은 예외 없이 손을 뻗쳐올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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