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움의 폭력성'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나의 눈앞에는 '~다움'의 폭력성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옥죄고 있는 줄은 사회에서 만들어낸 이미지를 뜻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는 '장애인 다움', '여자다움', '남자다움', '학생 다움' 등 같은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도록 만든다. 사회에서 만들어낸 '~다움'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남자애가 울면 어떡하니! 남자답게 뚝 그쳐야지.' '그런 건 여자애들이나 갖고 노는 거야. 총이나 레고 같은 장난감이 낫지 않겠니?' '학생은 공부나 해야지. 다른 일 하는 건 시간 낭비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말에 반항하려 하지만 어느새 이미지에 끼워 맞춰 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성 소수자는 어떨까. 사회의 주를 이루고 있는 이성애자보다 편견에 시달리기 쉬울지도 모른다. '성 소수자 다움'에서 비롯한 견고한 장벽에 부딪혀 상처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 다움'에 대한 고민은 한 책에서 비롯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소설이었다. 이 작품은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각각의 편에서 성 소수자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박상영 작가는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나는 이 중에서 제목과 일치하는 작품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은연중에 나를 지배하고 있는 시선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접하기 전, 성 소수자의 삶은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힘겨운 나날을 이어 나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 자체가 차별이자 '성 소수자 다움'에 갇힌 잣대였다. 나를 깨달음으로 이끈 것은 두 문장이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_『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문학동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
과 자이툰 파스타 편) p.180 중에서
"동성애자 캐릭터가 그렇게 발랄한 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게 어색한 것조차 모르잖아. 당신, 소재에 대해 제대로 고민한 게 맞긴 맞아?"
_『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문학동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편), p.181~182 중에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성 소수자, 게이다. 인용한 글은 주인공이 영화 상영회 뒤풀이에 참석했을 때 나온 부분이다. 주인공은 여느 이성애자 커플과 같이 게이의 '평범한' 생활을 그린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어디에서도 주목받지 못했고, 지인 덕분에 조그만 영화제에서 겨우 상영할 수 있었다. 상영회에는 주인공과 같은 소재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주인공과 달리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수상까지 했다. 주인공이 의문을 가질 때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같은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상까지 받고, 다른 사람은 주목조차 받지 못했을까. 그것은 성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영화에는 '치명적인 지점'이 없었고, 다른 이의 작품에는 그것이 있었다. 치명적인 '지점'은 철저히 이성애자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른 이가 만든 작품은 실제 성 소수자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극적이며 영화를 보는 사람들(주로 이성애자)의 눈물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당사자인 성 소수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주인공도 영화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영화에 나온 성 소수자의 모습은 이성애자의 '판타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뒤풀이에서 주인공의 작품을 향한 평론가의 의견은 이를 잘 보여주었다. 동성애자는 발랄해서도, 평범해서도 안 되었다. 사랑을 나누는 자유가 제한되며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고뇌에 차 있는 모습이 동성애자들이라고 평론가는 말하고 있었다. 동성애자들이 사랑을 이루는 과정도 이성애자보다 지난하리라는 생각을 드러냈다. 나도 이러한 시선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었다. 성 소수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상처 투성이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은 '성 소수자 다움'이란 단단한 벽이 원인이었다.
_Photo by Caleb Ekeroth on Unsplash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이미지였다. 이미지는 성 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두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작품은 나를 또 다른 생각으로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성 소수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조심스레 답을 내놓았다. 성 소수자는 어쩌면 평범함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똑같은, 평범한 존재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성 소수자들은 이성애자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다워야 한다'는 시선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는 성 소수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본다. '~다움'의 무자비함은 예외 없이 손을 뻗쳐올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