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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이양 May 05. 2020

기쿠지로의 여름

나는 누구에게 위로를 준 적이 있는가?

"기쿠지로의 여름"은 9살 소년과 어른 아이 50대 아저씨의 모험담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영화가 주는 특유의 B급 정서와 유머를 좋아한다.

뜬금없는 줌 아웃하는 카메라 워크로 만들어 내는 코미디도

한 템포 늦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집 기법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 영화만의 리듬과 유머도 좋다.

이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들 어딘가 약간은 모자라 보이고 괴짜 같은 사회의 아싸 들이지만

이 아싸들이 뭉쳐서 주인공 소년에게 잊을 수 없는 여름방학 추억을 만들어 준다.

주인공들이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서 새로운 챕터가 열릴 때마다 따뜻한 조 히사시 음악감독의 음악까지  흐르다 보니 그 음악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추천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영화가 주는 잔잔한 재미를 떠나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감정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상황으로 보여줌으로써 공감하고 배우게 한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고 어린 9살 소년에겐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는 혈연으로 맺어지거나 친해서가 아닌 낯선 자들로부터 받는 위로가 얼마나 따뜻한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낯선 사람들의 호의는 그렇게 한 아이의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고 미소 짓게 만든다. 그 따뜻한 기억으로 인해 아이는 상처를 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롱쇼트의 활용법

여름방학 동안 9살 소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를 찾아 나서려고 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50 대 동네 아저씨는 우연한 기회에 이 아이의 사정을 알게 되고 엄마 있는 곳까지 동행하기로 한다. 약간의 허세와 뻔뻔함으로 아내한테 구박받기 일쑤인 아저씨지만 마음만은 따듯한 분이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이 9살 소년은 혼자 밥도 챙겨 먹고 혼자 운동장에서 노는 외톨이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딘가 어른스럽고 또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롱쇼트로 운동장에 덩그러니 혼자 서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단번에 느껴진다. 넓은 화면에 작은 점처럼 보이는 아이는 영화로 보여주는 그림으로만으로 우리의 감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의 묘미는 이런 장면에서 그 진가를 나타낸다. 굳이 대사로 외롭다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아이가 충분히 고립됐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임을 바로 캐치할 수가 있다. 이 장면 외에도 롱쇼트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은데 이들의 막막한 상황들이나 마음들을 보여줄 때 쓰인다. 예를 들면 돈도 없고 히치하이킹도 실패한 두 사람이 버스정류장에서 노숙을 하고 길을 떠나는 장면에서 서로 의지 할 수밖에 그 외로운 감정을 다시 한번 롱쇼트로 잘 보여준다.




#음악을 절제함으로 극의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낸다.  

이 영화에서 이 아이는 대체로 말이 없다. 그리고 음악도 절제되어 사용하는 장면들이 많다. 아이가 엄마의 사진을 발견하고 엄마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하며 뛰여 나갈 때 처음으로 조 히사시의 희망찬 음악 Summer 가 나온다. 이 따뜻한 음악이 앞으로 펼쳐질 이 아이의 모험이 희망찰 거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리고 모든 장면에서 음악이 사용되지 않지만 이 두 주인공이 여행 중 새로운 챕터를 열 때마다 다시 음악이 흐르면서 이 두 사람의 여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 Montage 기법으로 보여주는 심리적 공포

아이를 안전하게 엄마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라고 받은 돈으로 철없는 아저씨는 도박으로 돈을 거의 다 날려버린다. 돈을 잃고 홧김에 아저씨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아이는 혼자 공원을 배회하다가 하마터면 성추행당하게 할 뻔한다. 다행히 아저씨가 자리에 없는 아이를 일찍 발견하고 찾아 나섰기를 망정이지 아니면 어느 변태 같은 할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날 밤 아이는 그날의 기억이 트라우마가 돼서 악몽을 꾸게 되는데 그때 등장하는 장면들이 Montage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Montage 장면이란 극의 흐름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장면들의 넣음으로 극의 긴장감과 텐션을 만들어 내는 편집 기법이다. 이렇게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감정을 대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이미지로 보여주는 방식은 사실 오랜 고전영화들에서도 많이 쓰는 기법이다. 영화과에 가면 우리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제일 유명한 Montage 기법을 자랑하는 영화가 Sergej Eisenstein's 1925 film Battleship Potemkin Prokopenko이다. 그 유명한 계단신은 나중에 Untouchable에서도 패러디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로 찍고 서로 상관없는 장면들을 중간중간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편집함으로 극의 긴장감과 감정을 이끌어내는 방식인데 이 영화에서는 대체로 붉게 물든 화면에서 그 변태 할아버지가 다시 나와 기괴한 춤을 추면서 아이와 엄마를 해하려 하는 장면이다. 나중에 이런 장면이 또 한 번 반복되는데 주로 아이의 공포적인 심리를 나타내고자 할 때 쓰인다. 영화학교에서도 가르칠 때 모든 상황과 감정을 대사로만 전달하려고 하지 말고 이미지로 분위기로 표현하는 법을 강조한다. 대사로 혹은 내레이션으로 푸는 방식은 영화를 날로 먹으려고 한다며 대체로 많이 혼났던 기억이 난다.  설명에 대한 부분은 아래 영상들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Roger Corman 이 코멘트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ESDxUnZ1fo

Untouchable 패러디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RJ539f5Ugc

 

# Assembly! 편집을 통해 만들어내는 코미디

아까 위에서 말한 Montage 기법 외에 편집의 배열을 다시 함으로 극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도 많다.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이 설명한 적이 있는 이론인데 예를 들면 한 남자의 클로즈업을 보여주고 다음 컷에 한 아이와 엄마가 놀고 있는 장면을 넣는다. 그리고 다시 남자의 웃는 리액션 장면을 넣는다. 그러면 이 남자는 아이와 여자를 자애롭게 보는 남자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반대로 중간에 들어간 아이와 엄마의 장면을 빼고 비키니 입은 여자의 장면을 넣으면 이 남자는 더 이상 자애로운 남자가 아닌 음흉한 남자로 변하는 것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는 알프레드 히치콕: https://www.youtube.com/watch?v=MJQE7Kv-9JU / 영상 마지막 부분)


이 영화에서 유독 이런 편집 기법으로 유머를 만들어 내는 장면들이 많다.

이 영화의 대부분 코미디는 한 템포 느리게 생각지도 못한 결과의 장면을 함께 붙임으로 코미디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수영장에서 수영할 줄을 안다고 큰소리치던 아저씨가 열심히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음 장면에 바로 물에 꽂혀 있는 아저씨의 장면을 보여준다거나 바로 뒤에 구조요원들이 와서 서 있는 장면을 연달아 붙이는 것들이다. 이 편집으로 우리는 아저씨가 구조요원들에게 구조됐을 거라는 상황만 추축 하게 한다. 보통 이런 코미디 장면에서는 일부러 우스꽝 스러운 음악을 넣는데 이 영화에서는 음악사용을 철저하게 절제한다. 반복되는 편집 기법과 음악 없이 보여주는 장면들에 처음에는 시니컬하다가도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웃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태워준 커플들과 함께 신나게 풀밭에 놀면서 웃는 장면이 있는데 그다음 장면에서 천천히 줌 아웃되면서 보이는 네 글자 "출입 금지!"라는가 이런 식의 유머들이 두 주인공이 처해있는 난감한 상황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자동차로 여행 다니던 소설가를 만나 차를 얻어 타게 되고 마침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엄마랑 하룻밤을 잘 계획도 세우고 실없는 농담도 하면서 엄마를 만날 기대에 부풀지만 차마 집 앞까지 가지 못한 아이는 멀리서만 엄마의 집을 지켜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집에서 나오는 엄마가 만나게 되는데 엄마는 이미 단란한 가족을 꾸렸고 자신이 없이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돌아서서 울면서 가는 아이의 마음이 어떤 건지를 잘 아는 아저씨는 집을 잘못 찾았을 거라고 아이를 다독인다. 혼자 해변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놔두고 아저씨는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동네 오토바이 족들을 만난다. 그러곤 특유의 뻔뻔함으로 대뜸 그들 오토바이에 매달려 있는 천상의 종 장식품을 내노라고 떼쓴다. 돈도 없고 이 아이에게 뭐든 가져가서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천사의 종을 가져다가 아이한테 주면서 엄마는 이사 갔을 거고 엄마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달래며 이 종을 울릴 때마다 천사들이 와서 도울 거라고 말한다. 아이가 종을 몇 번이나 흔들지만 당연히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우울해하던 아이는 모래사장에 큰 천사의 종을 그리고 먼저 앞장서 가는 아저씨의 손을 달려가 잡는다.

처음으로 아이가 먼저 달려가 아저씨의 손을 잡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긴긴 여정의 끝에서 어쩌면 진짜 아버지와 아들이 된 것처럼 두 사람에게 끈끈한 유대감이 생긴 것이다. 옆에 파도가 치고 바람은 불어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힘차게 걷는다. 여기서 영화가 끝나면 뻔한 영화로 남았겠지만 엄마를 못 찾아도 일상은 다시 돌아와야 하듯이 이들의 돌아가는 여정 또한 앞으로 계속돼야만 하는 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다.


대부분 일본 영화는 특별한 서사가 없이 진행될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밥은 먹어야 하고 출근은 해야 하는 것처럼 일상이 영화처럼 매일 스펙터클 하지가 않다. 약간은 지루하고 또 약간은 심심하다. 이 두 주인공도 엄마를 찾지 못했다는 슬픔을 이기기도 전에 다시 생존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임무가 생긴다. 옥수수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훔치다가 둘은 그때 자기네를 태워줬던 소설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전에 아저씨에게 천사의 종을 뺏겼던 오토바이족들도 합세해 최대한 아이를 위로하는 작전에 합심한다. 예를 들면 고기가 없는 강에서 우스꽝스러운 문어와 팔딱거리는 물고기 행세를 한다든가 우주인 행세를 하고 아이를 웃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들을 보면서 아이는 잠깐이라도 그 슬픔을 잊고 해맑게 웃는데 보면서 아이가 웃어서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모두 사람들에게 신세와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또 알게 모르게 가끔은 한번 스치고 마는 인연으로 인해 인생의 아주 큰 고비를 넘길 때도 있다. 이미 스쳐간 그 낯선 이는 그들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떠났는지를 아마 영원히 모를 수 있다. 이 곳에 모여 아이를 웃게 만든 서로 모르는 사람은 낯선 이들처럼 말이다. 때로는 말로 하는 위로보다 옆에 아무 말 없이 같이 있어주는 위로가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영화에서 보았듯이 도움을 청했을 때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이 아이를 위로해준 건 제일 하찮아 보이는 동네 건달 아저씨, 아직 작가 지망생인 떠돌이 소설가, 할 일이 없어 동네를 어슬렁 거리는 오토바이족들이다. 초면인데도 선뜻 그리고 기꺼이 선의를 베푼다. 쓸모없는 인간은 없다. 어떠한 직업을 갖고 있고 부유한 자인가 하는 건 선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 조건이 되지 못한다. 각자가 사회에서의 역할이 다르고 쓰임새가 달라도 누구든 어떤 모양이든 사람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제일 하찮아 보이는 이들이 이 아이를 웃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전달하려는 메시지보다 빠른 전개로 관객들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나도 가끔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영화가 진행도 빠르고 재미있어서 찾아본다. 하지만 이런 일본 영화에서 보여주는 느리고 잔잔한 서사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을 때가 있다. 스펙터클 했던 영화들을 보고 나면 그래 재밌었어 라고 내용을 잊어버리는 반면 이런 영화들은 대사보다도 극 전개로 보여주는 따듯한 메시지라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점은 선의와 호의를 베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구나 였다. 큰 것을 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외면하지 않을 때 이 시대의 아이들이 좀 더 건강하게 자라겠구나 싶었다.



모든 여정을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처음으로 아저씨의 이름을 물어본다. 이름을 이제야 물어보냐는 듯 아저씨는 면박을 주지만 웃으면서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 그렇게 보고 싶은 엄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 여정을 통해 아이는 전처럼 그늘이 지지 않고 다시 웃을 수 있게 된다. 하늘색 천사 날개를 단 가망을 메고 다시 힘차게 세상 안으로 달려가는 장면처럼 이 아이는 일상으로 돌아와도 함께 한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이겨낼 힘을 찾은 것 같다. 아마 이런 게 좋은 영향력인 것 같다. 사회의 나쁜 사이클이 아니라 좋은 사이클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 어쩌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만큼만 우리가 베풀어도 작은 아이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한다. 요즘같이 시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영화, 오랜만에 다시 이 영화가 보고 싶었고 보는 김에 같이 글도 썼다. 새들 소리 지저귀는 봄날에 보고 나면 마음 따뜻해지는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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