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비가

by 캐서린의 뜰


수요일 오후 두 시간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는 늘 허기짐과 허탈함을 안고 온다. 정오에 집을 나서는 일이라 돌아오면 서너 시를 훌쩍 넘긴다.

어제는 마침 기다리지 않고 버스를 타서,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돌아왔다. 쌀을 불리지 않고 찬밥으로 뚝딱 지어낸 굴솥밥을 마주하니 피로와 공복으로 냉랭해진 내 몸에 금세 온기가 돌았다. 얼마 전 남편 때문에 답답하고 속이 상해 지인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단 나의 말에 그저 따뜻한 굴밥 한 그릇 해 주고 싶다던 작가님의 말. 그 한 마디가 얼어붙은 내 마음에 포개져 먹는 내내 식지 않은 뚝배기의 열기로 날 위로해 주는 듯했다.

굴을 사면서 내친김에 동태를 사려다 돈을 더 주고 사온 민어로 매운탕을 끓였다. 지난 주말 딸기를 사러 갔다가 비도 오고 날은 어둑해지는데 서둘러 그날 장사를 접고 싶어 하는 야채가게 청년이 등 떠민 듯 판 미나리가 냉장고에 쓸모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생면부지 야채가게 점원에게도 측은한 마음이 들어 필요 없는 미나리를 사 온 내가, 맘에 들지 않은 전우일지라도 때로는 측은한 전우애로 남편에게 칼칼하고 뜨끈한 매운탕 한 그릇은 끓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


자정을 넘긴 시간, 나는 마치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그때 눈이 떠진다. 그래봤자 고작 한 시 두 시. 그때부터 두세 시간은 뜬 눈으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첫새벽에 이르러서야 겨우 깊은 잠에 든다. 멜라토닌과 마그네슘의 효능을 가뿐히 이겨내는 그 규칙적인 1차 기상시간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초저녁에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한 내게 벌칙처럼 주어지는 오밤중의 기상 후, 잠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도록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하며 그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핸드폰으로 라디오를 듣기도 했고, 쌓여있는 카톡을 읽기도 했고, 희미한 독서등으로 몸을 돌려 초저녁에 읽다만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런데 간밤에는 굵은 빗방울이 두둑 투두둑 창틀에, 옥상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겨울비 치고 제법 내리는 모양이었다. 경쾌한 박자와 다르게 한기가 돋아 있을 겨울비 소리를 들으며, 자기 전 신었던 수면 양말을 이불속 어딘가에 이미 벗어놓은 아이의 발 위로 젖혀놓은 이불을 다시 덮어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눈을 뜬 아침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오전에 외출할 일 없는 내게 겨울비가 허락하는 그윽하고도 흐릿한 풍경에 조용히 머물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을 품으며.


비는 그쳤지만 안개 자욱한 아침이다. 동이 텄지만 여전히 이른 새벽 언저리에서 기지개 켜기를 주저한 아침 해가 뿌연 장막뒤에 숨어버린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에 불을 밝혀도 좋은 그런 날이었다. 시계가 없었다면 하루 중 어느 때 일지 가늠이 안 되는 이런 낯설고 묘한 겨울날은 종일 손발이 시리다. 하지만 나는 무릎 담요를 덮고 연거푸 차를 마실테고 두터운 소설책의 마지막 장을 향해 꼼작 없이 읽어 내려갈지 모른다. 이렇게 허락된 시간을 무척 감사히 여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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