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는데 고속버스 차창을 타고 비가 주룩주룩 흐른다.
광주의 한 요양원에 올봄에 입원하신 우리 할머니가 얼마 전부턴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다고 하신다. 아이들이 방학할 때까지 할머니가 기다려주신다는 보장이 없어서, 슬프지만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다는 그 흔한 관용어조차 덧붙일 수 없는 할머니 연세가 나의 불안을 재촉했다.
지난겨울방학 때 뵈었던 증조할머니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맛있게 드셨는데 지금은 우리를 잘 알아보시지 못한다는 아이의 체험학습 보고서 한 줄이 할머니의 현재 상태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허리수술로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두고 전주에서 광주로 엄마의 엄마를 대신해서 뵈러 가는 마음이 척추 보호기구를 찬 엄마처럼 내 흉곽을 단단히 움켜쥐는 듯했다.
할머니네 논에서 농사진 쌀가마들, 할머니네 밭에서 자란 콩과 깨와 고추들, 할머니네 마당에 가지가 휠 듯이 매달린 감들, 할머니네 처마에 매달아 놓은 메주와 강냉이들, 그리고 이제는 빈 집이 되어버린, 머잖아 장손의 전원주택으로 쓰일 할머니의 집. 이 모두 할머니 것이나 친손주에게 꽉꽉 눌러 챙겨주었던 할머니의 정성에 외손주인 나의 지분은 들기름 한 병이 전부였지만 나는 늘 우리 할머니가 좋았고 그리웠고 헤어질 때는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많고 많은 손녀들 중에 나를 특별히 편애하신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날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엄마가 우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동생과 나는 잠시 외가에 머물렀었다. 쨍한 웃풍이 코를 시리게 하고 장미가 그려진 다홍색 담요 안에선 어린 내 몸이 구워삶아질 것처럼 바닥이 끓어올랐지만 이불을 박차고 나가면 밖은 허연 입김으로 가득해 꿈쩍도 하기 싫었다. 방안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광에서 시원하고 달콤한 홍시를 꺼내 양은 쟁반에 담아 아랫목으로 밀어 넣어주시곤 했다. 한낮에도 두텁게 미닫이 문과 여닫이 문을 함께 닫아놓으면 어둑했던 방안, 낮잠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디지, 잠깐 엄마 없음이 서글퍼지던 그 순간, 할머니가 밖에서 찬 문고리를 잡고 안방문을 열어젖혔을 때,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겨울 오후의 햇살과 지금의 엄마보다 더 젊으셨을 그때 할머니의 환한 웃음이 함께 새어 들어올 때면 꼭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할머니는 희미해져 가는 내 유년의 해진 기억의 모서리에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머물러 계셨기에 할머니의 옅은 숨에서 고롱고롱 퍼지는 온기를 어떻게서든 붙들고 싶고, 초점을 잃고 흐릿해진 할머니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1930년대 생이었는데도 말숙, 귀례, 갑분 같은 이름이 아니라 애경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니신 우리 할머니,
늬 할매가 노래를 얼마나 잘하시는지 아냐고 마실온 할머니들이 꼭 한 번씩 칭찬해 마지않았던, 정작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예쁜 목소리로 노래하는 우리 할머니,
칠순까지 까탈스러운 입맛의 구순의 시어머니를 봉양했던 솜씨 좋았던 우리 할머니,
세상 모질고 나쁜 것들을 향해서도, 때론 어이없고 우스운 일에도 호랭이 물어가네라고 추임새를 넣던 우리 할머니,
그 호랭이에게 우리 할머니만은 물고 가지 말라고 무릎 꿇고 빌고 싶은 시린 겨울의 아랫목 같은 나의 할머니.
십 분의 면회를 끝으로 다시는 품에 안을 수 없을 것 같은 식어가는 구들장 같은 할머니를 한번 더 안아드리고선 떨어지는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들어 옮긴다. 파란 대문을 나서 도랑을 따라 경로당이 있는 길까지 언제나 나를 배웅해 주시고 눈물을 한 번씩 훔치셨던 할머니는 이번엔 병상에 앉아 하얀 벽만을 바라보신다.
저 우산 안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요,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