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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초겨울 무참히 가지치기를 한 아파트 수목엔 봄 기척이 없다. 가지는 잘려나가고 몸통만 볼품없이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 계절은 한겨울에 멈춰버린 듯 시리다. 가지 끝에 머물며 노래하는 새도, 나뭇잎을 흔들어 주는 바람도, 오후의 풍성한 그늘도 모두 사다리차에 거둬가 버린 사람들.
아파트 6-7층 높이의 메타세콰이어는 잔가지 없이 3층 높이의 통나무만 장승처럼 서 있고
놀이터 둘레의 벚나무엔 벚꽃이 한 송이도 피지 못했다.
우리 동 입구의 목련나무에는 용케도 살아남은 목련 여섯 송이가 꽃을 피웠고 촉이 나간 전구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밝혀주었다. 그런 목련 나무 곁에서 아이는 너무 애썼다라며 어른 같은 말을 나무에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튿날 그나마도 벗겨진 바나나 껍질처럼 시들고 말았다.
달 밝은 밤, 모과나무 가지 끝에 맺힌 여린 새순을 발견하고선 비록 그 연다홍 꽃은 올해 볼 수 없겠지만 다행이라고, 이렇게 이겨내 줘서 나도 고맙다고 속삭여본다. 파리한 새순 끝에 별 하나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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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과 지하철이 지나는 집 근처 역사 둘레길은 동네 벚꽃 명소다. 부산과 여수까지 다녀온 기차가 숨을 고르고 차고지에서 느리게 기지개를 켠다. 아이와 오후에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섰다. 꽃길이 꿈결인 듯 우리도 서두르지 않고 걷는다. 아이는 여기 좀 있다가 가자고 한다. 엄마는 다리 아프니까 저 돌 위에 앉아 있으라며.
개미굴을 찾는다는 아이는 어느 틈엔가 민들레, 제비꽃, 떨어진 벚꽃을 하나씩 가져와 세상에서 제일 앙증맞은 부케를 내게 내민다. 아이는 내 손가락과 반지 사이에 꽃을 끼우려다 포기하고 신고 있던 슬리퍼 구멍에 끼워 넣는다. 세상에 하나뿐인 지비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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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옆으로 이어진 꽃나무에서 꽃구름이 뭉게뭉게 밀려 흐른다. 철길 안전 가림막이 없었다면 얕은 내리막길을 따라 철로까지 뻗어나갈 기세로 그렇게 휘몰아치듯 봄이 왔다. 하룻밤 사이에 중중모리에서 자진모리장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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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조리원 창문에서는 근린공원이 보였다. 타원형의 트랙 옆으로는 벚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고 그 아래를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보였다. 떨어진 꽃잎은 수선스럽지 않게 초록색 바닥 위로 모였다 흩어졌고 며칠사이 나뭇가지에는 붉은 꽃받침과 연초록의 잎이 꽃이 머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도, 또 나가 걷고도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저 나른하고 따스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가늘고 긴 숨을 내뱉었다. 내년 봄에는 널 안고 꽃나무 아래서 흠뻑 꽃비에 젖어보리란 상상을 하며 말이다.
그로부터 십일 년이 지난 오늘. 오전에 흩뿌렸던 비는 그치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찬란하다. 나가기 싫다는 너를 두고 나 혼자 산책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