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인도는 널찍한데 보행자를 마주칠 일은 별로 없는 아이와의 등원길. 인도 바깥쪽으로는 은행나무가, 안쪽으로는 벚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있는 100미터 남짓의 길이다. 더운 날엔 양쪽의 나무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듯 아치형의 그늘이 드리워져 걷기 좋고, 서늘해진 가을에는 사사삭 가벼이 흩어지는 벚나무 낙엽과는 달리, 묵직하게 내려앉은 플라타너스 잎이 서걱거리며 구르는 소리를 듣노라면 산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곤 한다.
바람결에 전단지처럼 저만치 쓸려가는 플라타너스 잎을 바라보다 20여 년 전 상해의 화해중로 골목을 걷고 있던 그녀로 눈길이 닿는다. 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늘어선 주택가 골목,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이웃집 식탁 위 사기그릇에 나무젓가락 닿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녹슨 철문을 밀고 침침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 낡은 2층집, 길 밖으로 난 창문 난간에 빼곡히 널어놓은 빨래들, 1층의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날 선 목소리로 흥정하는 소리, 길모퉁이 전봇대 옆 자전거 가판대에서 하나에 5 마오짜리 전병을 파는 그을린 얼굴의 행상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다. 지금 손 잡고 걷는 그와 함께라면 후미진 골목의 낡고 옹색한 저런 집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젖어있는 그녀를.
눈을 감으면, 상해의 잿빛 구시가지 골목골목에 표표히 나부끼는 플라타너스 갈색 잎이 떠오른다. 을씨년스러운 추위 속에서 홀로 찾아갔던 상해 임시정부 청사로 이어진 길목에서도, 그와 헤어지고 홍교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기다리는 거리에서도 내 안에 쌓여가는 적막한 서러움을 흔들어 깨웠던 플라타너스. 100년 전 나라 잃은 설움에 젖은 어느 애국투사들의 시선이 머물렀을, 그 망국의 국기와도 같은 플라타너스잎을, 그를 잃고 젖은 눈으로 내려다본다.
꾹꾹 눌러 담은 해묵은 슬픔이 터져 나오기 전에 내 손 잡고 걷던 아이가 나를 부른다.
“엄마, 이거 봐봐”
여름내 푸른 부채처럼 햇빛을 가려줬던 플라타너스 잎이다. 어느 부지런한 벌레가 플라타너스 잎을 이만치도 갉아먹었을까.
그때의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지, 애써 모른 채 살아온 좀 먹은 세월처럼 그렇게 무심히 또 가을이 깊어가나 보다.
사랑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앙상한 가지는 어느 해 봄에 뻗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