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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서린의 뜰 Nov 27. 2024

이그조틱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와 작별 할 시간


맹그로브 숲에 가 보고 싶었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어귀 어디쯤 제 뿌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아래 단단히 숨겨둔 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늘어진 나뭇가지가 강기슭에 밀려오는 잔잔한 물살에 한 뼘 밀려났다 되돌아오는 곳. 랑카위에 가야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맹그로브숲을 쿠알라룸푸르에서 한 시간 거리인 쿠알라셀랑고르에서 만났다. 말라카해협까지 세차게 내달렸던 모터보트의 엔진이 멈추자 사위가 적막해졌다. 석양이 수줍게 번져가는 하늘 위로 독수리 떼들이 유유히 떠다니다가 활강하는 자유로운 모습에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맹그로브숲에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자 모터보트는 머리를 돌려 다시 강 안쪽으로 내달린다.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하늘색이 차츰 침침해져 간다. 모터보트가 속도를 줄이고 강기슭에 바짝 다가서자 맹그로브 숲에서 뭔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반딧불이다. 이윽고 칠흑 같은 어둠이 온 숲에 내려앉자 수천수만 개의 꼬마전구가 반짝인다. 여름날의 크리스마스트리 위에 은은하게 깜박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큼지막한 선물꾸러미를 받은 아이처럼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맹그로브 숲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이튿날엔 쿠알라룸푸르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 거리인 말라카로 향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서양 열강이 점령했던 과거 말레이시아의 수도 말라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는 마카오처럼 유럽문화와 중국문화가 묘하게 섞인 데다 말레이 본토의 문화까지 어우러져 다채로운 매력을 풍겼다. 쿠알라룸푸르의 번쩍거리는 도도한 도시 풍경에 익숙해질 무렵 배낭 하나 챙겨서 말라카에 온 우리는 이 도시가 주는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토요일이라 존커 스트리트에 열리는 토요야시장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이슬람 사원과 불교 사원, 도교 사원들이 조화롭게 모여있는 하모니 스트리트를 걸었다. 골목마다 퍼지는 사원의 향 내음에 취하고 기도소리에 홀려, 다리 아프다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걷자고 사정했다. 내일은 호텔 조식이 우리를 기다리니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가서 씻고 푹 쉬자고.


말라카에서 돌아오는 날, 쿠알라룸푸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타게 된 패트릭의 그랩은 깨끗했다. 깨끗한 그랩을 만나는 건 뽑기에 당첨된 것 같아서 그날은 가는 내내 기분이 좋다. 고속버스에서 멀미를 할 듯 말 듯 계속 시달린 딸아이도 패트릭의 차 안에서는 괜찮다 한다. 어디를 다녀오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동시에 말라카라 얘기했다. 패트릭은 자신의 고향이 말라카라며 한 달에 한번 부모님을 뵈러 말라카에 간다고 했다. 신기한 우연이었다. 아이들은 말라카 길가에서 본 도마뱀 이야기며, 수로변을 걷다가 만난 수달, 어떤 골목에서 거북이를 마주친 것 까지 집에 도착하는 내내 패트릭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책으로 영어를 배운 나는 한마디 내뱉기가 조심스러운데, 넷플릭스로 영어를 배운 아이들은 거침이 없다. 우리가 며칠 뒤 쿠알라룸푸르를 떠난다 하니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연락처도 넘겨주었다. 여행 잡지 속의 별책부록처럼 말라카에 다녀온 후 우린 다시 하루 한 곳씩을 들르고 매일 점심 새로운 음식을 맛보며 우리의 속도로 이 나라와, 이 도시와 친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3주 머물기로 한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시간이 어느덧 다 채워져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하룻밤을 자고 나면 남은 날이 하루 줄어든다. 무한할 것 같은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살다가 해외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은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게 된다. 미뤄왔던 곳들을 빠트리지 말고 들러야 했다. 평소 일찍 자는 아이들 때문에 저녁 무렵이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탓에 반짝이는 쿠알라룸푸르의 밤거리를 다녀보질 못했다. 그날은 작정하고 오후 늦게 집을 나섰다. 늘 근처까지 갔다가 한낮의 땡볕아래 걷는게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고 있었던 마지드 자멕 사원 주변을 산책하기 위해서였다. 초저녁 어스름에 대지의 열기가 사그라들 무렵 두 줄기의 강물이 만나는 이곳엔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 신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소란스럽던 관광객들이 사라진 자리엔 퇴근길 현지인들만이 남아 조금 더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마치 청계천을 걷는 듯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현지인의 일상에 스며든 기분을 만끽했다. 마침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어서 이 날은 미루고 미루던 지하철 타기를 시도해 보았다. 조금만 걸어도 덥다고 투덜대는 녀석들을 조금 덜 걷게 하려고 그간 편한 그랩만 탔었지. 지하철을 타 보지 못하고 쿠알라룸푸르를 떠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날의 습도, 온도, 채도 모든 게 저녁 산책을 하기에 완벽했다. 그 와중에 개찰구에 토큰을 서로 넣는다고 실랑이하는 아이들. 잘 시간이 가까워지자 피곤해했지만 모노레일 노선으로 환승하자 한 번씩 지나쳤을 법 한 도심 곳곳을 ‘어, 우리 저기 갔었지’ 하며 차창 너머 풍경을 추억한다.


살면서 쿠알라룸푸르란 도시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피부색이 밝을수록 쇼핑몰 명품관에서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확률이 높았고, 피부색이 어두울수록 쇼핑몰 화장실을 청소하는 확률이 높았던 아시아의 축소판 같던 곳. 그럼에도 이 도시가 펼쳐 보여주는 팔색조의 깃털같은 그 화려함이 좋았고 그 속에 감추어진 수줍은 미소의 얼굴들로 인해 이 도시가 나에게 준 기억들은 두고두고 꺼내볼 만큼 아름답고 소중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거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자꾸만 줄어드는 게 못내 아쉬워 숙소에서 보이는 야경을 눈에 담고 또 담아두는, 아이들도 나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패트릭의 그랩을 타고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해 페낭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otic [igza:tik] (특히 열대 지방에 있는) 외국의, 이국적인.  


오래전 이 영단어를 처음 맞닥트렸을 때 발음도 생소하고 단어의 뜻마저도 그 생소한 발음에 어울린다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이그조틱이란 단어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난 아마도 말레이시아를, 쿠알라룸푸르를 그렇게 정의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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