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울푸드 아쌈락사
쿠알라룸푸르에서 페낭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인데 비행기가 두 시간 가까이 연착이 되어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에 페낭에 도착했다. 페낭 공항 출국장 택시 승강장 앞은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차량이 진입하는 도로 절반이 공사장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고 진입로로 들어오는 차량과 도로 가운데 차를 세우고 짐을 싣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인천공항 도착까지 무사하길 바라는 우리의 아슬한 캐리어를 옆으로 눕혀놓고 그 위에 ‘엄마 피곤해’, ‘엄마 배고파’ 를 30초 간격으로 재생하는 아이들을 앉혀놓고 아까부터 진전이 없는 그랩의 현재 위치만을 핸드폰 화면으로 애타게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 근처에 있는데, 저 공사장 가림막을 반바퀴만 돌고 오면 되는데 그랩은 꿈쩍 않고 대기 시간만 3분 더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다시 또 늘어났다 반복한다. 그렇게 30분 이상 기다린 그랩은 결국 승강장 진입을 포기하고 승차를 거부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와 이 시간까지 점심을 못 먹은 아이들의 얼굴이 배고픔과 피곤함, 짜증으로 뒤섞여 있다. 아이들의 짜증이 높아갈 때 어르고 달래면 그 짜증이 한없이 이어지곤 한다. 못된 방법인 줄 알지만 그럴 때 나는 맞불을 놓듯 더 격하게 짜증을 낸다. 그래야 아이들의 짜증이 꼬리를 내리니까.
”아까 비행기에서 준 물, 엄마가 배낭에 무겁게 메고 왔는데 너희가 지금 다 마셨지? 엄만 너희한테 양보하느라 갈증 나도 참았어. 그리고 너희는 캐리어 위에 지금 앉아있기라도 하지. 엄마는 배낭 메고 30분째 서서 그랩 기다리고 있잖아. 누가 더 힘들겠어. 너네야 엄마야, 어? “
1절만 하고 멈췄어야 하는데 한번 불붙은 화는 그라데이션 분노로 이어진다. 나도 배고프고 피곤하고 다리 아프고 허리까지 아프니까.
“내가 그랩을 취소한 것도 아니고 그랩 기사가 말도 없이 취소했는데 그게 엄마 잘못이야? 너넨 비행기에서 과자 먹었잖아. 엄만 여태 아무것도 못 먹었어.”
말하다 보면 더 치사해지고 더 유치해진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근처에 한국인이 없음을 귀를 쫑긋 세워 확인하고 3절은 신세한탄으로 이어진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놈 새끼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 고마워 하기는커녕. 다시는 너네랑 여행 오나 봐라. “
아, 이제와 글로 복기하니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사실인걸 어쩌랴.
다시 어렵사리 잡은 그랩은 어이없게 5분 안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에어컨 나오는 차에 배낭을 벗어던지고 올라타니 작은 아이가 내 무릎 위에 올라앉는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든다. 끊어질 듯 아팠던 허리를 뒷좌석 등받이에 기대니 이글이글 타오르던 내 마음도 누그러진다. 잠든 아이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준다. 배낭에 기대 반쯤 누워있는 큰 아이의 흐트러진 잔머리도 괜히 쓸어 올려주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나는 쿠알라룸푸르와 사뭇 다른 풍경의 이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달각달각 덜걱덜걱 거리는 우리의 캐리어는 여러 개의 턱을 위태롭게 오르내리고 숙소에 도착했다. 이제 5부 능선을 넘은 셈. 다시 페낭공항에서 쿠알라룸푸르공항을 거쳐 인천공항으로 부실한 네 바퀴를 굴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만 된다. 카드키로 문을 열었던 쿠알라룸푸르와는 달리 페낭의 숙소는 열쇠로 문을 열어야 했다. 숙소는 예약할 때 보았던 사진과 느낌은 흡사했으나 예상보다 좁았고, 쿠알라룸푸르의 숙소가 번쩍이는 시티뷰로 우리를 맞아줬던데 반해 페낭의 숙소는 항구뷰로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성치 않은 다리로 고생한 캐리어를 얌전히 눕혀놓고 점심겸 저녁을 먹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숙소 밖으로 나오니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 대부분이 화교 같고 간판도 대부분 한자다. 싱가포르라 하기엔 조금 허름한 느낌이지만 나름의 정취가 있어 흡사 대만에 있는 것 같다. 길만 건너면 근처에는 크고 작은 호커 센터가 있고 아시아 음식이 한자리에 모여있어 취향에 맞게 음식을 고를 수 있어서 좋았다. 심지어 어설픈 내 영어를 못 알아듣길래 역시나 어설픈 중국어로 얘기하니 바로 알아듣는다. 대만 맞네 대만. 속으로 괜히 반갑다. 무척 이국적이라 천천히 친해졌던 쿠알라룸푸르에 비해 페낭은 이렇게 친근함으로 내게 훅 들어오다니. 갈비탕을 좋아하는 큰 아이는 그와 유사한 탕 형태의 바쿠테를, 면을 좋아하는 작은 아이는 뽀얀 국물의 해물면을 시켰고 나는 생선튀김이 올라간 밥을 시켰다. 아이들은 땀에 절어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돌아오는 길에 생수도 사고, 편의점 옆 과일가게에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유자가 보여 반가운 마음에 유자를 샀다. 중국에서 맛봤던 유자를 페낭에서 만나다니. 자몽보다 덜 쓰고 더 달달한 중국유자를 처음 맛본 아이들은 남은 유자를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챙겨 먹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심심찮게 음식 앞에 페낭이 붙어 있는 걸 봤다. 페낭 아쌈락사, 페낭 올드타운 커피, 페낭 토스트… 전주가 전국의 식당 상호명으로 쓰이듯 페낭 역시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지역인가 보다 막연히 추측했는데 내 예상과 맞았다. 시장 근처 길모퉁이 식당에서 먹어본 나시르막은 쿠알라룸푸르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고 편의점 삼각김밥을 사 먹듯 시장에서 바나나잎에 쌓인 300원짜리 나시르막부터 계란프라이, 오징어, 닭고기가 토핑으로 올라간 나시르막까지 아침을 나시르막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하루의 원기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으로 매일 나시르막을 사 먹었다. 페낭의 대표음식 아쌈락사를 먹기 전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이미 커리락사에 빠져있던 나는 락사를 먹을 때마다 번번이 아쌈락사 주문을 미뤘다. 어느 날 뒤늦게 상호명이 페낭 락싸인 푸드코트에서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인 아쌈락사를 처음 주문했다. 한국인 입맛에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아쌈락사는 꽁치김치찌개 맛이라고 하니 내가 분명 좋아할 맛이라 기대를 안고 먹어봤다. 뭉큰히 끓인 꽁치김치찌개 맛도 났고 오래전 남해에 갔을때 먹었던 멸치쌈밥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비릿한데 시큼하고 또 개운하기도 한 묘한 맛. 뒤늦게 아쌈락사를 맛본 큰 아이는 매운 음식을 여전히 잘 못 먹는데도 물을 연거푸 마시면서 내 아쌈락사를 뺏어먹었다.
매콤 칼칼한 나시르막(매운걸 못 먹는 아이들은 볶음밥인 치킨라이스를)으로 아침을 깨우고, 더위에 지쳐 입맛도 없는 점심엔 커피 한 잔에 은근한 단맛을 내는 카야토스트(아이들은 수란 추가)를 베어 물면 선물 같은 휴식이 찾아온듯 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엔 얼큰한 아쌈락사(아이들은 볶음면인 차퀘티아오를) 한 그릇으로 고단했던 하루를 위로받는 듯했다.
페낭을 떠나는 날 공항 식당에서 아쌈락사를 마지막으로 먹은 기억이 난다. 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던 큰 아이와 나. 비나 눈이 내릴 듯 흐리고 꾸물거리는 날에 짬뽕이 생각나듯 지금도 가끔 아쌈락사가 생각난다. 어쩌면 페낭이 그리운 것일지도. 오후에 또 눈 예보가 있다. 점심은 짬뽕밥을 먹고 후식으로 페낭 올드타운의 믹스커피를 마시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