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의 서울, 경주, 부산을 갔으니 제주도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배시시 웃게 만드는 익살스러운 골목 벽화며, 페인트가 벗겨지고 손때가 탄 형형색색의 창틀과 정갈한 어느 집 현관 바닥에 펼쳐진 만다라 문양의 타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페낭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구석구석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너무도 많았는데 아이들은 덥단다, 그만 가잖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털털털털 연신 더운 바람만을 뿜어대는 올드타운의 어느 길모퉁이 식당에서 아이스 마일로와 카야 토스트 그리고 수란을 시켜줘도 이제는 심드렁해져 반을 남긴다. 가뜩이나 덥고 지친데 유네스코 역사문화보존지구인 이곳을 아이들은 마뜩잖아 한다. 그저 몹시도 내 취향이었다. 땀으로 샤워를 하더라도 나는 더 쏘다니고 싶었다. 한국 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생수를 얼굴에 뿌려가면서라도 발가락이 부르트게 걷고 싶었다.
여행 잡지의 별책 부록에 이어 사은품을 아이들에게 증정할 때다. 페낭에 열흘 머무르면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제주도와 같은 랑카위를 가기로 했다. 페낭에서 비행기로 40분 거리의 작은 섬인데 노을이 예쁘다 하니 혹했다. 코타키나발루가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제주도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현지인들은 신혼여행이나 휴가지로 랑카위를 보통 꼽으며 코타키나발루는 우리의 울릉도처럼 아름답지만 현지인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 맹그로브숲을 이미 봐서 랑카위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페낭에 오기 일주일 전 랑카위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세찬 비가 내려서 밖에 나갈 수 없는 날, 즉흥적으로. 쿠알라룸푸르의 숙소보다 비싼데 더 좁고 더 낡은 페낭의 이틀 치 방값이 아깝긴 했지만 성치 않은 우리의 캐리어가 묵는다 생각하고 다시 배낭 하나만 메고 랑카위로 떠났다.
명불허전.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코로나를 거치며 우리가 본 바다는 누렇고 거친 모래밭 혹은 갯벌이 드문드문 펼쳐진 서해바다가 전부였는데 랑카위의 바다는 격이 달랐다. 그곳의 모래는 내가 살면서 본 해변의 모래 중에 가장 곱고 하얬다. 백사장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와닿는 그런 바다였다. 그런데 고운 설탕가루 같은 그 하얀 모래가 작열하는 태양빛을 반사해 저만치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이 든다. 자꾸만 눈이 시큰거린다. 시린 눈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그늘 한점 없는 모래밭은 건식 한증막 같아 1분을 버티기도 어려운데 아이들은 몇 시간째 놀고 있다. 내가 페낭 올드타운을 조금만 더 걷자고 할 때는 더워서 한 걸음도 가기 싫다던 아이들인데 그보다 더한 더위에서 저렇게 놀고, 나는 덥고 눈부셔 찔끔찔끔 눈물이나 흘리고 있다니. 이젠 내가 숙소로 돌아가자고 아이들을 재촉할 차례다.
“서영아, 준영아. 엄마 더워 죽겠어. 제발 가자”
감귤빛의 하늘을 대봉시빛깔로 짙게 물들인 랑카위의 석양은 마지막까지 수평선 위로 붉은 광선 한 줄을 강렬하게 적셔놓고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른 저녁 구름뒤로 아스라이 스러져갔다.
페낭에서 돌아온 다음 날 대형마트에 들러 한국에 가져갈 기념 음식들을 샀다. 24인치 캐리어에서 버리고 갈 아이들 옷 몇 벌과 수건들을 빼내고, 챙겨 왔던 보스턴 백에 아이들 수영용품을 옮겨 담으니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더 이상 신선식품으로 냉장고를 채울 필요가 없어 이제는 캐리어에 담아 갈 아이들 간식과 지인 선물들로 장바구니 하나를 채웠다. 얇게 채 썬 쥐포, 올드타운 커피믹스, 마일로 너겟, 카야잼 그리고 호랑이연고까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그 옆 작은 구멍가게에 들러 아이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콘을 사 주며 날 위해 향신료를 샀다. 계피, 통후추, 레몬그라스, 월계수잎, 정향, 팔각등이 섞어진 작은 비닐 꾸러미였는데 사실 돌아가서 뭘 해먹을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돌아가서 가끔 말레이시아가 그리울 때 말린 꽃잎처럼 꺼내어 볼 수 있게, 혹은 향기 맡아볼 수 있게 향낭처럼 지니고 싶었다.
페낭 숙소에서 마지막 날을 느리게 보내고 이튿날 아침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들을 아쉽지 않게 이것저것 포장해 와서 먹었다. 거리의 매연도, 빠른 손놀림의 주인아주머니의 손때도 고스란히 포장된 1링깃 내지는 2링깃짜리의 아침 식사에서 조차 이 도시에 대한 내 애정이 한 귀퉁이 담겨있다 생각했으니까. 버릴 수건들로 바닥을 깨끗이 닦고 흐트러진 이부자리도 잘 펼쳐놓고 우리는 페낭섬 북쪽에 있는 바투페링기 해변으로 우리의 마지막 여정을 향해 문을 나섰다.
가능한 현지인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비록 엷은 농도지만 그들 사이에 희석되고 싶었던 한 달이었다. 설탕이 안 들어간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간절했으나 더위에 그런 커피숍을 찾길 포기한 여러 날들이 있었고, 핏물과 구정물이 고여있는 시장 바닥을 까치발로 들고 장을 본 날도, 자동차가 지나가는 길 바로 옆에 천막을 친 노상 인도식당에서 손을 씻지도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밥알을 흘려가며 먹은 날도 있었다. 정가보다 늘 2~30프로 비싸게 책정되어 있는 외국인 입장권을 사면서 내가 이방인이라는 걸 한 번씩 깨닫긴 했지만 무성한 열대의 가로수와 푸른 이끼가 밴 누런 담장 옆을 지나는 행인 23, 24, 25번쯤이 되어 걷는 시간들을 사랑했다. 바투페링키 리조트에서의 사흘은 사뭇 다른 풍경으로 우릴 반겼지만 말레이시아에 대한 나의 추억은 길을 잘 못 들어 헤맨 어떤 골목 가판대에서 화교 할머니가 먹기 좋게 잘라주신 튀김 한 점에, 힌두사원 근처의 꽃가게에서 알싸하게 피어나는 이름 모를 열대의 꽃향기에, 쇼핑몰 화장실에서 걸레질을 멈추고 손을 씻는 이국의 아이를 바라보는 무슬림 아주머니의 잔잔한 미소에 오래도록 깃들어있을 것이다.
리조트에서의 조식을 감사히 누리고, 마지막까지 수영장물에 몸을 적신 큰 아이를 씻기고, 한국 가기 싫다고 침대 구석에 걸터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작은 아이를 어르고, 수명이 다해가는 캐리어를 살살 달래어 끌고 자정 무렵, 쿠알라룸푸르에서 인천으로 가는 환승행 비행기에 가까 스스로 몸을 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처음 장을 보러 동네 마트에 나갔다 오는 길에 작은 아이가 담담히 속내를 말한다.
“엄마, 나 말레이시아 또 가고 싶어.”
“엄마도. 말레이시아 정말 좋았지?”
“응, 말레이시아 마트 이모들은 잘 웃어주고 말도 걸어주는데 한국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아.”
한국으로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우린 그곳에 두고 온,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미소가 벌써부터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