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누비스 Dec 11. 2023

연말이지만 즐겁지는 않아

오히려 이 상황이 불쾌하고 속상해


 연말이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데코와 환한 불빛이 여기저기를 밝히며 반짝이고 있지만 이를 보는 내 기분은 그다지 밝지도 반짝이지도 않는다. 연말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과 백화점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고 감탄하며 사진 찍기에 바쁜 이들 사이에서 내 마음은 묘하면서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가톨릭에서는 지금 이 기간을 '대림'이라고 한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이자 주님 성탄 대축일(크리스마스) 전의 4주간의 기간. 이 기간이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축제 같은 분위기고 이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이 차분한 것을 넘어 무거울 것이 있나.


 대림 1주였던 12월 첫 주일 달력을 받으려고 미사 후 주보를 들고 성당 마당을 나와 달력을 받은 뒤 주보 안쪽을 살짝 펼쳤는데 어느 글과 눈이 마주쳤다. 글의 내용은 최근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내용 중 성전환자(트랜스젠더)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대한 글이었다. 안 좋은 내용일 것임을 짐작했음에도 그 글을 읽어보기라도 한 뒤에 생각하자 싶어서 끝까지 읽어봤고 결과적으로 내 기분만 매우 상했다. 제도교회는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안 하면서 온갖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을 덧붙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가톨릭 신자와 논바이너리 에이섹슈얼 바이로맨틱이라는 성소수자 정체성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내 입장에서 불쾌하고 속상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메뚜기 같은 삶을 살아왔기에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은 나름 익숙했지만 앞으로도 적어도 제도교회에는 내 자리가 평생 없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 상황이 지나고 나니 sns로 다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감리교의 한 목사님이 종교 재판에서 출교를 당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겪은 일로 인해 개신교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목사님이 진심으로 성소수자와 연대해주셨다는 것을 알기에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종교가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엿을 주는데 소수의 성소수자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소수의 성직자들이 우리와 연대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참아줘야하냐는 말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저 조용히 원 트윗을 알티하고 재판 비용에 대한 후원금을 모은다길래 소액을 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거의 연달아 일어난 이 일들에 내가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제도교회가 보수적이다못해 쓰잘데기없는 곳에서까지 꼰대처럼 구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그리스도교는 하나같이 짜고치는 것마냥 성소수자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도 이전부터 익히 알던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을 이야기한다면서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혐오로 얼룩진 언어로 말하는 지금 이 상황을 신자로서 그리고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보고있자니 답답하고 괴롭다. 종교는 나와 신 1대1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몰아붙이며 우리를 미워하는 모습에 문득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성소수자 당사자의 "국가도 우리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종교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걸 보고 있으면 국가고 종교고 다 갖다버리고 싶다"는 말이 너무나 공감간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지금 내 종교를 버리겠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회의감이 안 든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은 있다.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어느 한 쪽도 잘한 것 없이, 대체 우리가 뭘 했다고 마치 우리를 바퀴벌레처럼, 빈대처럼, 시궁창쥐처럼 '박멸'하지 못해 안달인건지. 나야 제도교회가 뭐라 하던 함께 갈 분들이 계시기에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신도들 앞에서는 사랑을 얘기하고 뒤돌아서 성소수자들한테는 더러운 혐오로 얼룩진 언어를 쏘아붙여서 본인들이 무얼 얻는다고 그러는건지.


 크리스마스가 2주 남은 이 시점에서 기분이 좋진 못하다. 그 와중에 불을 붙인 대림초는 참 조용히도 잘 탄다.



작가의 이전글 스스로를 돕지 않는 사람을 도울 수는 없는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