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보고싶다고 생각한다니
달력을 보고 나서야 무려 10번째 기일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이 기일이라 12월에 접어들면서 어느정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벌써 10번째라니.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간다던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이제는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고 얼굴은 흐릿해져서 이름만 겨우 기억나는 그 친구의 기일에 다시금 한없이 작아짐을 느낀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두 번째 물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너무 확실히 알게 한 그 날의 잔상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의미겠지. 몇 년간 1차급 의원부터 3차급 대학병원까지 정신과를 전전하며 만난 온갖 의사들한테는 말하지 못하다가-또는 말하지 않다가- 지금의 의사쌤에게는 말해도 괜찮겠다 해서 있는 그대로 말했고 그건 뫄뫄 씨 잘못이 아니에요. 라는 말을 들었지만 1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 나는 그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언제가 되면 확실히 수용할 수 있을까.
그 친구는 생전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나와 같은, 개신교 집안에 태어나 개신교만을 알던 아이였다. 그 일이 있고 한참 지나서 종교의 자유를 앞세워 내 종교는 내가 결정하겠다고 우겨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니까. 그래서 개신교 신자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 친구의 기일에 내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옳은 짓일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당사자의 배경은 무시하고 내 편의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그 친구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니까 그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숨김 없이 다 말했기에 그동안과 비교했을 때 그나마 나은 것이려나. 그런걸 보면 자신에게 솔직해짐으로서 위로를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솔직해짐으로서 도움을 받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구나 싶기도 하다.
밤이 늦어서인지 조금은 보고싶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으면서 뭘 보고싶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사는 것이 이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