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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비스 Jan 06. 202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낙원은 없지만 맑은 날씨에 탁 트인 평원은 있을 수 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세상은 어디나 다 부조리하고 안 좋은 곳이니 그냥 니가 참으세요 하는 식으로 잘못 이해하곤 하지만 실제로 이 말의 뜻은 그렇지 않다. 지금 뭔가 잘 안 되니 다른 곳으로 가거나 혹은 다른 것을 하면 괜찮을거라는 마술적사고와 비스무리한 생각으로 살아선 안 된다는 의미인데 사람들은 잘못 해석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 말에 일정 부분 맞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피하려는 회피와 유아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그런 의미에서 도망친 곳에는 천국이 없다는 말은 틀린 것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우에 따라 도망치는 것도 필요하며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더라도 날씨 맑은 평원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신교에서 불가지론으로, 불가지론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은 이런 말을 하곤 하셨다. 성당에 가면 무조건 좋을 것 같고 다 해결될 것 같냐, 다 비슷하고 그러니 그냥 이 교회에 있어라, 라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초등학생 적부터 교회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의 타겟이었고 그 가해자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에 남아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질환이 발병하고 타의에 의해 까발려지면서 온갖 어줍잖은 동정과 고깝잖은 불쌍하게 보는 눈빛을 잔뜩 받아야 했다. 나에게 그러는 것은 어찌어찌 참을 수 있었지만 동생에게까지 그 시선은 이어졌고 동생이 교회 청년회 사람에게 "너네 언니 불쌍해" 라는 말을 듣기에 이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원래부터 천천히 탈교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때부터 더욱 철저히 차근차근 탈교할 결심과 준비를 쌓았고, 몇 년에 걸친 준비와 말다툼과 손절에 손절 끝에 교회를 벗어나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도망친 곳이 마냥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주보에 성소수자 혐오가 묻어져나오는 글이 실리는 것을 보며 속상하기도 했고 성당에 간다는 이유로 넌 종교가 있으니 가짜 퀴어야 라는 막말을 듣기도 했다. 때로 의견이 맞지 않아 모임 내에서 말싸움이 나는걸 보기도 했고 나와 맞지 않는 신자가 있어서 입을 삐죽이고 눈을 돌리며 못본 척 모르는 척 무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좋은 점도 있다. 이런저런 좋은 점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스트레잇하지 않은 나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 생각하고 혐오와 차별에 어떻게 대응할 지에 대한 고민을 이 곳에서 나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내 소수자성을 드러내도 괜찮은 안전지대가 생겼고,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아시지만 그래도 연대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내 옆에 분명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서 정말 좋고 감사한 마음이 있다. 성소수자 당사자도 가족도 아님에도 나 그리고 우리와 연대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을 보고 세상은 불공평함과 동시에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쪽에서는 혐오를 내비치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앨라이로서 나서주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무지성으로 회피하기 위한 도망걸음으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처음부터 없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불가피하게 도망쳐야 하는 경우 역시 존재하며 그렇게 해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을지 몰라도 평원은 있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맑게 개인 날씨가 걸쳐진 탁 트인 평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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