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멋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당 입구에서 성지가지를 받으며 이제 진짜 부활절이 가까웠구나 생각했다. 작년 이맘때에 정식으로 가톨릭에 발을 들여서 일요일 아침 예비신자교리를 들으러 매 일요일마다 명동성당을 다녔던 기억이 떠올라 왜인지 기분이 묘했다. 벌써 그게 1년이나 지난 일이라니. 여전히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고 가면 갈수록 요상한 개드립력만 늘어서 이게 진짜 가톨릭 신자가 맞긴 한건가 싶은데 다음 달이면 견진성사를 받을 예정이고 아마 연말 즈음에는 대녀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니 복잡미묘해졌다.
원래의 내 계획대로라면 견진성사를 되도록 늦게 받을 생각이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마당에 내가 누군가의 대모를 한다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대모를 하기에 나는 너무 부족하고 보잘것없으며 머릿속에 들은 것은 온갖 잡다한 개드립 뿐이라는 생각에 최대한 미루고 미루려 했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각대로 꼭 되지는 않는다더니, 진짜 그러하더라. 평소 가깝게 지내는 동생이 나를 따라서 미사를 와보더니 예비신자교리를 시작했다는거다.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라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나를 따라서 온 것이기에 세례성사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라는(?) 대모를 내가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대부모는 단순히 가톨릭 신자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만 가능하기에 나의 계획과는 너무나 다르게 빨리 견진성사를 받기로 했다. 이에 대해 내 대모를 해준 친구도 시간이 있을 때 하는게 좋긴 하지ㅋㅋ 하는 반응이었고 서울대교구 홈페이지를 확인해서 집에서 가능한 가까우면서 동시에 날짜가 빠른 성당에 부랴부랴 견진 교리를 신청했다.
<빨간 머리 앤>에서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멋지다는 말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인생사는 생각대로 되지 않고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서 멋지다. 그래서 인생은 멋진걸까. 아직 나는 멋지다는 것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나도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니까. 평생 부모님의 종교에 묶여서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가겠구나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무려 이 집안에서 처음으로 그 고리를 끊고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갔다. 그게 가능할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었다. 당시에는 너무 정신없어서 돌아볼 겨를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다.
받을 때에는 하나였던 성지가지를 종이백에 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밤늦게 와서 보니 두 개가 되어있어서 큰 가지는 벽고상에, 작은 가지는 탁고상에 걸어두었다. 예비신자 교리를 듣기 시작했던 것이 딱 1년 전 일이고 그 생각지 못한 일이 여기까지 왔으면 앞으로는 어떤 생각지 못한 일이 있을까. 그 생각지 못한 일에서 파생된 것들이 모두 괜찮기만 할까. 아니면 모두 나쁘기만 할까.
아직은 모르겠다. 인생을 덜 살았다는 증거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