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으면 너가 꺼지던가 말던가
땡스기빙 주간을 맞아 동생이 본가에 왔고 다함께 미루고 미루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봤다. 재밌게 봤고 노래도 좋았지만 한편으로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그 내용이 너한테 지뢰가 될 수 있을거다"고 말했던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루미와 진우를 성애적으로 로맨스적으로 엮는 내용에서 '굳이 여기서 성애와 로맨스를 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 뿐이었고 사람들은 루미를 도와주는 진우의 모습에서 로맨틱하다 이러던데 나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건 친구끼리도 하는거 아닌가? 저게 대체 어디가 왜 로맨틱하지?'싶은 생각의 굴레에 갇힐 뿐이었다.
이런 느낌을 느꼈던게 비단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만 그랬던게 아니다. 오래 전 <주토피아>를 보고 나는 닉과 주디가 우정의 관계라 해석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닉과 주디를 사귀는 관계로 엮고 그걸 기반으로 망상하고 글과 그림을 생산해내는 모습을 보는게 왜인지 환멸이 났다. 그래서 <주토피아>를 상당히 재밌게 봤음에도 나 혼자 조용히 <주토피아>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적이 있다.
왜 인간들은 모든걸 기본적으로 사귀는 관계 그러니까 성애와 연정으로 얽힌 관계라 이해하는걸까? 그렇게 성애와 연정이 좋을까. 도통 나는 이해가 가지도 않을 뿐더러 이제는 늙어서인지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어짜피 남의 세계이고 다수자의 사회를 내가 딱히 이해해줘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런 것인데 사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도 아니기에 포기한 것에 가깝다. 내가 노력만 하면 유성애 하는 이성애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 중반 후반의 시간을 허비하다시피 한 것을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기에 이 부분에서 더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그게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알아버렸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없지만 컨텐츠의 무성애 커밍아웃을 한 캐릭터들이 더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캐릭터가 무성애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은 내가 쓸데없는 부담감을 가지지 않고 편하게 볼 수 있으며 나와 같은 정체성을 일부 공유함으로서 내가 캐릭터나 스토리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도 폭 넓게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30살을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스폰지밥을 끊지 못한다. 스폰지밥이 공식적으로 무성애 캐릭터이기에 작중에서 로맨스나 성애가 등장하지 않고-물론 이런 암시를 하는 부분이 없잖아 있기는 한데 그정도는 충분히 내가 넘길 수 있는 정도이다- 이래도 커플로 엮어먹을 사람들은 하지만 딱히 덕질하는 장르도 아니라 나는 내가 안 하면 그만이다보니 맘 편하게 볼 수 있기도 하다.
세상에는 성애와 로맨스가 전부가 아니다. 사랑의 종류도 성애와 로맨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세상에는 성애와 로맨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것, 예쁜 것, 귀여운 것, 좋은 것, 맛있는 것, 재밌는 것이 그렇게 차고 넘치는데 희한하게 다수 사회는 성애와 연정을 그렇게도 고집하고 또 고집하며 나같은 사람을 이상한 별종 또는 사랑을 모르는 불쌍한 정신병자 취급한다. 과거에는 이런 현실에 상처받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력도 없다. 그냥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싫으면 너가 꺼지던가'가 되어버린다. 성애와 로맨스가 과대포장되고 철저히 그 중심으로 돌아가는 다수 사회에게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내 역할이기도 하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다수 사회에 엿을 먹이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들을 가르치는 짓에 약간은 환멸이 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