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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Sep 25. 2018

암을 진단받은 세 아이의 아버지

45세에 진단받은 죽음의 질병 

“90년의 늦가을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참석후 만취하여 자정 쯤에 귀가한 그이는 평소보다 피곤해 보였다. 나는 그러한 그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틑날 아침 평소같았으면 새벽 6시 기상, 시골에 계신 어머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 시간임에도 그이는 일어날 기색을 안 했다. 아침 출근시간이 가까워 그이를 흔들어 깨웠을 때 그이는 몸이 이상하다며 아무래도 병가를 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날 오후 그이를 데리고 제주시내 XX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종합 진찰을 해봐야겠다고 했다. 불안감이 들었다. 감기 정도의 몸살로 알고 있었는데 종합 진찰이라면 크게 이상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었다…… 
(중략) 
“담낭암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서울로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의학으로 담낭암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나를 안심시키려 들었다. 나는 온몸이 주저앉는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나는 그이에게 담낭암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짐짓 태연해 보이려는 나에게서 그이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1990년 가을. 건강했고 활력이 넘쳤던 40대 중반의 세 아이의 아버지. 부교수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학문의 전성기를 눈앞에 둔 경제학자. 그는 눈자위가 노래지고, 소변이 검붉게 나오며, 전에 없이 피곤한 이상한 증상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지금은 나의 모교가 된 의과대학의 부속병원에서 담낭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의 수술은 O&C (open and close를 줄여서 병원에서는 흔히 O&C라고 부른다. 개복을 하였다가 질병이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어 있어 수술을 포기하고 다시 절개한 피부를 봉합하는 것이다)였다. 아마도 진단을 위한 조직검사를 했을 것이고, 옆구리에는 플라스틱 관을 꽂았다. 담도를 막고 있는 종양 때문에 십이지장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고여 있던 쓸개즙을 몸 밖으로 빼내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수술장에서 벌어진 일의 전부였다.    

 

의과대학 본과 3학년때 들은 외과학 수업 중 <담낭의 질병>을 강의하신 분이 아버지의 집도의였다. 주로 빈도가 높은 질병인 담석과 담낭염에 대한 내용이었고, 담낭염에 대한 수술을 설명하시며 ‘나도 쓸개가 없어’ 라며 우스개 삼아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담낭, 우리말로 쓸개라는 장기는 간에서 만든 쓸개즙을 모아서 저장했다가 십이지장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사는데 큰 지장은 없는 그런 장기. 왜 하필 그런 장기에 암이 생겼던 걸까. 수업을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 아빠도 1990년 가을까지 그렇게 건강하지 말고, 차라리 담낭염이라도 앓았었다면, '쓸개없는 인간'으로 살아갔었더라면. 

그 병엔 안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 

담낭암에 대한 내용은 학생 강의록 말미에 나온 몇 줄이 다였다. 예나 지금이나 치료방법이 퍽 많지는 않은 암종에 속하니, 학생들에게 가르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 몇 줄의 내용 – 담낭에는 장기의 겉을 싸고 있는 장막이 없어 암이 간으로 퍼지기 쉽고 예후가 매우 나쁘다-을 보면서도 나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 때 이미 마음만은 의사가 다 되어 있었나 보다.  

 

"담당의사는 미소 띤 얼굴로 종합진찰결과를 그이와 나에게 설명하여 주었다. 담낭에 이상이 생겼는데 간단한 수술만 하면 완치된다는 그런 내용의 설명이었다. 그의 앞에서 암이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이는 중하지도 않은 병을 갖고 법석을 떨었다며 나를 나무랐다. 그날 오후 나는 그이 몰래 다시 담당의사를 만났다. 담당의사는 오전의 환한 모습과는 달리 매우 침통해 보였다. 불안했다.  


담당의사가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맨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해야 했다. 담당의사의 이야기는 그이의 담낭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됐다며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그이가 이 세상에 남을 수 있는 시간이 1년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1년의 시간조차 더 짧아질 수도 또는 약간 길어질 수도 있다고 하며 만약 수술을 한다 하여도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기록한 것은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병원에서 담당의사가 암 진단과 기대여명에 대한 나쁜 소식을 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본인에게는 가급적 희망적인 방향으로 포장해서 말하고, 제대로 된 설명은 가족은 따로 불러다가 하는 것. 대개는 환자에게 설명하기 전 가족들을 만나 환자에게 어느 정도 '수위'까지 이야기할지를 먼저 정하게 된다. 나 또한 의사로 살아가며 수없이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 방식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간절한 눈빛을 하고 있는 40대 남자에게 “당신은 암 진단을 받았고 앞으로 일년 정도를 살 것”이라는 잔인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해야 한다. 말도 잘 안나오고, 환자의 반응이 두렵다. 그것이 절망이던 분노이건간에. 가족이 미리 ‘환자가 너무 절망할지 모르니 나쁜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며 부탁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럼 저는…죽는 건가요?’ ‘다른 치료방법은 없나요? 어떻게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죠?’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요?’ 절망에 찬 질문에 차례로 답하면서 확인사살을 하는 악역은 십년 이상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이 택하는 방식은 ‘미루기’다. 진실을 말하는 것을 미루는 것. 가족들 역시 환자 뒤에서 온갖 몸짓을 하며 당장은 얘기하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환자를 심리적 충격에서 보호하자’는 명분 아래 의사와 환자 가족들의 동맹이 이루어진다.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환자의 인격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대한의사협회가 펴낸 의료윤리강령 중 하나다. 현실에서는 어떤가. ‘종양내과’ 또는 ‘암병원’ ‘암센터’에 진료를 받으러 오면서 굳이 ‘그냥 혹’ ‘양성종양’으로 포장해서 환자에게 설명해주기를 원하는 가족들이 있고 바쁜 의사는 그 요청을 그냥 받아들이고 만다. 환자에게 치명적인 병명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료진을 원망하는 가족들도 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의료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있다 (나의 전공의 수련 동기였던 선생님이 직접 겪은 일이다). 이래저래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소모와 원망과 괴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집으로 오던 날 밤 그이는 자신의 병명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하며 자신도 짐작을 하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이의 눈망울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순간 나는 그렇다, 이것은 숨겨서만 될 일이 아니다, 본인 자신도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두려움과 공포심을 그이에게 털어 놓아 역위안을 받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몰랐다.  
담낭암과 간암의 이야기, 1년이라는 시한부 생명임을 그이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이와 나는 그날 밤새 말없이 울었다. 그날 이후 그이는 1년이라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두 분이 밤새 울고 나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와 동생들의 아침밥을 챙기고 등굣길을 배웅했을 그날. 차디찬 1990년 12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중학교 2학년 큰딸은 한달여 동안의 병원생활 후 부모님이 돌아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약간 들떠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 없이 동생들과 할머니와 지내야 했던 몇 주가 지옥 같았고, 한번은 부엌에서 쌀을 씻다가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사춘기여서 감정조절이 더 어려웠던 것 같다) 비명을 지르고 목놓아 울었던 것이 기억난다. 아빠는 배에 플라스틱 관을 꽂은 낯선 병자의 모습이었지만, 엄마의 지치고 슬픔에 찬 표정에 함부로 말을 건네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가 있어 좋았던 열 다섯 살의 겨울이었다.  

환자에게 역으로 위안을 받고 싶었다는 어머니의 글에서, 진실을 숨기고 홀로 껴안고 있는 것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 아마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찢어진 돛이라도 붙잡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환자가 절망할까봐 차마 말하지 못했었던 것을, 도리어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짐을 덜고 싶은 상황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느꼈을 좌절은 지금도 상상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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