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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그리고 진단서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서효인/박혜진, 난다, 2018

by OncoAzim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진실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건 말하지 않는다. 충격저인 저 문장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뫼르소가 끝내 포기하지 않는 침묵의 알리바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 뫼르소, 인간 존재의 부조리가 있다.


여행 중 읽은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의 한 페이지다. 저자인 박혜진 편집자는 새로운 <이방인> 번역본을 내며 본인이 속한 출판사인 민음사판과의 비교 논란에 불을 붙인 번역가의 해석에 대해 이런 답을 내놓는다. 인간 존재의 부조리.문득 생각난 것은 나의 진단서였다. 거짓은 말하지 않되 진실을 모두 말하지는 않는 진단서. 이것도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해당할 수 있을까.
나는 <이방인>을 읽지 않았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이유들 중 하나다. 소위 고전이라 할 만한 것들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부끄러워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나를 책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끄럽다. 지금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라는 말을 내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서 부끄럽다. 그래서 다음에 써놓은 것은 <이방인>에 대한 내 해석이라고 할 순 없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놓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알고 싶으니까 나중에 꼭 읽어봐야지.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평소보다 더 많은 환자를 보며 정신이 없던 와중에 거의 끝자락에 본 환자는 진단서를 받으러 온 분이었다. 일해도 괜찮다는 진단서를 써주세요. 안색도 양호하고 부작용이 심해보이지는 않았다. 대장암으로 항암화학치료중이며 치료 후유증이 크지 않아 직장생활에 지장이 없겠습니다., 라고 쓰니 그녀는 말한다. 치료하고 있다는 얘기는 쓰지 말아주세요. 네? 그런 얘기가 들어가면 좋지 않게 볼 것 같아서요. 저는 괜찮으니까 수술하고 나서 양호하다는 얘기로 써주세요.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로 어떨지 모르는데요, 라는 애기까지 할 시간이 불행히도 없었다. 요구하는 대로 거짓은 없으니 (수술하고 나서 비교적 양호한 전신 상태인 것은 사실이었다.) 잽싸게 자판을 두드리고 전자서명 버튼을 눌렀다.
항암화학요법을 받는 환자의 진단서는 외상처럼 전치 2주, 4주, 이런 기준이 없다. 보통 좋은 직장에 다니는, 또는 보호자가 좋은 직장에 다니는 환자는 몇 개월간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원한다. 투병 또는 간병을 위한 휴직을 위해서다. 종종 수술 후 3-6개월 정도에 이르는 치료기간이 종료되고 나서도 회복에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나는 종종 일견 ‘ 멀쩡해 보이는’ 그들이 환자역할이 주는 이득을 누리고자 한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회복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고 그것이 그의 직무수행에 영향이 없을 거라고 단언할 만한 어떤 근거도 내게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몇 가지를 물어보고 환자가 원하는 대로 작성해주고 만다. (사실은 조금 더 정밀한 문진과 신체검진이 필요하겠지만 대개의 후유증인 피로, 인지기능저하, 이상감각은 결국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암환자 및 암경험자가 호소하는 증상을 대부분의 의료진들이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보인 많은 연구결과들도 치료를 종료한 암경험자에게 ‘당신은 이제 환자가 아니’라고, 나가서 일하라고 내몰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반면 어떤 이들은 다른 진단서를 원한다. 치료 중에도 일할 수 있다는 진단서. 업무수행에 지장이 없다는 진단서. 일을 할 수는 있으니, 그리고 그보다는 일을 해야 하니 원하는 것일 테다. 아마도 비정규직, 임시직, 일용직, 몸에 이상이 있으면 직업안정성이 사라져버리는, 그런 이들일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위의 환자처럼 병에 대해 시시콜콜히 적기를 원하지 않는다. 3기, 4기, 항암화학요법, 이런 따위의 말들이 진단서에 들어가면 안된다. 암 치료를 받았지만 나는 사회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으며 돌아갈 수 있음을 증명받고 싶어한다. 실제로 항암치료를 하며 직장 일을 병행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일반 사무직 업무라면 (‘사무직’이라고 뭉뚱그리기엔 어려운 엄청나게 큰 노동강도의 다양성이 있겠으나)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사가 해도 됀댔어’ ‘의사가 하지 말랬어’라는 말에 담겨있는 엄숙한 의미를 담아 진단서를 써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불확실성이 있고 환자를 평가할 시간은 너무나 짧으며 결국 감에 일정부분 의존하고 상당부분은 환자의 편에 서서 작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에전에는 이렇게 같은 상태에 대해 다른 진단서를 쓰는 것에 상당한 부적절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그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 엄숙한 진단서가 이토록 주먹구구였다니. 물론 입원을 요하는 심각한 의학적 상태, 또는 수술 후 5년 이상 된 암경험자에게 정반대의 진단서를 써주진 않는다. 이런 고민은 늘 회색지대에서 발생한다. 환자의 경험에 대한 내 인식의 깊이를 믿을 수 없는.

위암 투병기를 인스타그램에 연재하고 있는 <사기병>이라는 작가(@sagibyung)의 그림을 보았다. 옥살리플라틴이라는 항암제를 맞으며 겪은 구토를 치떨리게 표현해낸 그 그림에서 작가는 ‘옥살리…옥살리… 이름만 들어도 구역질이 난다’라고 말한다. 내가 가장 많이 처방하는 중등도 (moderate)의 구토유발항암제. (high에 비하면 구토유발이 적다, 문헌에 의하면) 직장에 다닐 수 있다는 진단서를 써달라던 그녀가 맞는 항암제도 옥살리플라틴이다. 적절히 항구토제를 사용하면 며칠 울렁거리고 이내 괜찮아진다고 설명하는 항암제. (실제 환자들 대부분은 그렇게 말하기는 한다) 그녀도 그런 설명을 듣고 주사를 맞았을 텐데.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느라 변기와 혼연일체가 된 몸을 표현한 떨리는 검고 가느다란 윤곽선을 보며 모든 항암제 설명과 교육과 동의서와 진단서와…이런 따위의, 환자의 고통을 타인이 평가하고 사회적으로 입증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쩔수 없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다 본질적으로는 부적절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일까 아닐까. 진단서에 쓰는 불확실한 진실, 또는 구태여 드러내지 않는 일부의 진실, 그 사이에 있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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