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헌책방에서 만난 인연

<암, 경제적으로 상대하는 법 >, 김정하 저, 2004

by OncoAzim

집 근처에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큰 헌책방이 문을 열었습니다. 청계천에 주로 모여있는 헌책방들이 입점하여 책을 판매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호기심에 한번 들어갔다가 의외의 책을 한 권 만나게 되었습니다.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두고 왔는데, 이곳이 도서관처럼 다시 찾기 쉽게 책이 정렬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습니다. 이곳에 참여하는 책방 별로 책이 모아져 있기는 하지만, 특정 책의 위치가 정해져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한번 마음을 둔 책을 다시 찾기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책을 사려고 두 번을 다시 갔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절판이 된 책이고 인터넷 중고서점에서도 이미 품절이 되었군요. 다시 한 번 찾아간다면 만날 수 있을지... 한 번 놓치면 다시 잡기 어려운 사람 사이의 인연과도 같이 여겨졌습니다.

"암, 경제적으로 상대하는 법"이라는 2004년에 나온 책입니다. 저자는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던 경제전문가였고, 40대에 다발성골수종을 진단받아 투병을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헌 책들 중에 이 책이 눈에 처음 들어왔던 것은 저의 전공인 '암'이라는 단어 때문이기도 했지만, '경제적으로 상대하는 법'이 많은 환자들의 실질적인 고통에 닿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마주친 것은 예상치 못한 추천사였습니다. 병동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추천사를 쓴 책은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추천사를 쓴 이들 중에는 소설가도 있었고, 기업인도 있었지만, 동료 환자의 부인도 있었고, 그의 어린 딸도 있었습니다.

저도 늘 병원에서 청소를 하는 용역업체 직원분들을 마주칩니다만, 그들에게 살뜰하게 인사를 건네지는 못합니다. 일하고 있는 중에 제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시면 서로 불편하므로 목례만 하고 얼른 나가버리곤 하지요. 아픈 와중에도 청소아주머니에게 밝게 인사를 했다는, 그리고 자신의 책에 추천사를 부탁하는 존경을 보여준 그의 심성이 어떤 것인지, 다발성골수종이 어떤 병인지 아는 저로서는 감히 상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발성 골수종은 항체를 생산하는 형질세포라는 백혈구에 생기는 혈액암입니다. 온 몸의 뼈에 구멍이 숭숭나고 쉽게 바스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환자들 중에도 중증도가 조금씩 다 다릅니다만, 쉽게 골절이 생기고 극심한 통증이 생기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전공의 때 수많은 환자의 골수검사를 했지만, 다발성 골수종 환자의 골수채취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뼈가 워낙 퍼석퍼석하고 약해서 힘조절이 쉽지 않고, 제대로 뼈 조각이 채취가 된 것인지 확인도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수검사는 잠쉬디 니들 (Jamshidi needle)이라는 어마무시한 두께의 전용 바늘을 쓰는데, 바늘을 둘러싼 원통형 대롱의 모양대로 길쭉한 뼛조각이 나옵니다. 조각이 길수록 검사를 훌륭히 해냈다는 자부심이 차오르곤 했지요. (길게 나온다고 환자가 더 아픈 것은 아닙니다. 대개 제대로 못한 경우 더 아픕니다) 그러나 다발성골수종 환자의 뼛조각은 대개 형태를 갖추지도 못한 가루같은 형태로 골수와 뒤섞여 질퍽한 액체 모양으로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뼈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싶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jamshidi needle.JPG 골수채취 전용도구인 잠쉬디 니들. 국소마취를 한 후 이 바늘로 골반뼈를 찔러 골수를 채취합니다.

저자는 진단 당시는 물론 이식으로 이어지는 치료 과정에서의 수많은 고통 속에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그가 늘 향했던 것은 삶이었습니다. 병원에서의 삶, 집안 형편과 아이들에 대한 걱정, 동료환자들과 의료진들에 대한 이야기들, 끊임없이 생각하고 적어두면서 그 시간들을 견디어내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암환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치료비 마련에 대한 이야기를 본인의 전문성을 살려 '투병재테크'라는 이름으로 풀어내었습니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은 사실 15년전이므로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는 위중한 질병도 힘든데 경제적 고통까지 받아야 하는 당시의 의료제도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당시에는 보험적용이 되지 않았던 많은 치료들이 현재는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환자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부족하기는 할 것입니다) 다발성골수종 치료는 이젠 저도 이름을 잘 모르는 많은 표적치료제들이 빠른 속도로 도입되고 있으며, 면역세포치료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병을 마주하는 고통과 혼란은 역시 큰 차이는 없는 듯 하였습니다.

'경제'가 들어간 다소 딱딱한 제목이고, 실용서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한 권 분량의 글을 엮어낸 힘은 어린 딸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위험한 내과적 치료 중 하나인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까지 거쳐 결국 직장에 복귀하는 것으로 책은 끝을 맺었고, 저는 그의 여정이 계속 되었기를 바라며 자못 궁금해졌습니다. 집에 오는 동안 그의 이름과 한국은행을 검색하였습니다. 한국은행 인사 이동 기사에 나열된 많은 이름들을 훑어보았지만 그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트위터에 올렸는데, 그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어떤 지인분이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는 딸이 쓴 추천사는 차마 읽지 못하고 책을 덮고 나왔더랬습니다. 드레스를 입고 병문안을 왔었다는 그의 공주님은 지금 20대이겠죠. 그의 딸도 저와 같은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겠지만, 또한 저와 같이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상처로 깊어진 마음은 다른 이의 슬픔과 쉽게 공명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간의 행복과 기쁨의 의미를 더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이 반짝이고 있기를 빌며, 헌책방에서 이 책을 다시 한 번 마주치는 인연을 기대해보아야겠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