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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Dec 22. 2019

슬픔의 크리스마스 트리  

싸구려 인조 트리를 인터넷에서 사서 해마다 이맘때 장식하는 것이 아이들과 즐기는 소소한 기쁨이었는데, 올해도 꺼내려다 보니 트리가 없어졌다. 떠올려보니 별을 달아야 하는 맨 윗부분이 내 실수로 부러져서 둘째가 서럽게 울었던 기억도 나고... 그러면서 버렸던 듯하다. 새로 하나 사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사는 것은 먼지나 부스러기가 많을 것 같아서, 병원 내 화원에서 비싸긴 하지만 하나 사들고 들어가기로 남편과 얘기하고 나니 문득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the fault in our stars)"에 나온 대사가 생각난다.

림프종 환자의  PET-CT 사진. 본 사진은 글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출처:  www.medscape.com

골육종 재발을 진단받은 남자주인공 어거스터스가  여자친구인 헤이즐에게  털어놓던 말.

“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빛났어, 헤이즐 그레이스. 내 가슴, 왼쪽 엉덩이, 간, 모든 곳이 다 빛났지.”

PET-CT에는 종양이 검은 색 배경에 밝은 불빛으로 나타난다. 온 몸의 여기저기에 다 퍼진 전이암이 한꺼번에 불빛을 발하듯이 나타난 그 사진에는 아마 몸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 빛날 수록 더 절망스러운 그런 사진. 나는 오늘 아침에도 보았다. 쓸 수 있는 항암제를 다 쓰고 마지막 희망을 안고 임상시험치료를 하러 입원한 한 남자의, 크리스마스 트리같던 몸을. 항암치료를 쉬어도 기운이 점점 없어지고 입맛이 더 떨어지더라는, 그의 낙심한 눈빛을. 그의 몸에서 타고 있는 불꽃들을 이 약이 조금이라도 꺼뜨려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의사가  PET 검사를 권하는 환자들은 대개 전이암이 있는 환자들이다. CT 만으로는 감별이 안되는 병변을 확인하거나, 또는 항암제 치료 전후의 암세포의 대사 정도를 비교하기 위해 찍는다. FDG-PET은 포도당을 많이 섭취하는 암세포의 성질을 이용하는 검사다. 만약 항암제가 효과를 보이면서 암세포가 죽거나 성장이 정체되면 포도당 섭취가 감소하면서 사진에서 보이는 빛이 줄어든다.

환자에게  PET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대개는 잠시나마) 치료 후 저 빛이 꺼진 것을 확인하여 기쁨을 주기 위해. 또 하나는.... 전이암이라고 설명을 드렸음에도 수술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복해서 물어보는 환자와 가족에게 확인을 시켜주기 위해 보여준다. 당신의 몸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빛나고 있어서, 불붙은 가지 하나를 꺾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우선은 소화기를 써야 한다고. 하얀 가루를 뒤집어쓰는게 싫더라도 지금은 그걸 써야 한다고. 그렇게 하더라도 다 꺼질 지 모르는, 불씨가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다시 번지고 마는 그런 불이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 환자는 아마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심정이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말. PET-CT에 나타난 크리스마스 트리는 절망에 쐐기를 박는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여서,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는 환자에게 병에 대한 인식을 줄 때 유용하기는 하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주는 혜택 치고는 참으로 공허하다. 물론 PET은 이러려고 만든 기술은 아니고 주로 진단의 정확도를 올리고 치료 반응을 예측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 역시 갑상선암으로 투병중인 환자인 헤이즐은 어거스터스가 PET을 찍으러 갔다는 말을 꺼냈을 때 이미 어떤 말이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데 소모되었기 때문에 어거스터스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이를 악문다. 고개를 든다. 사람들이 내가 우는 걸 보면 상처받을 거라고, 내가 그들의 삶에서 '슬픔'이라는 존재밖에는 되지 못할 거라고, 단순한 '슬픔'으로 전락할 수는 없으니까 울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목이 메이는 상태라 해도 어쨌든 울음을 삼키고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미소를 짓는다."

PET-CT의 불빛으로 나타나는 슬픔과 고통, 그것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와 단백질의 변화, 여기에 영향을 주는 종양미세환경, 마이크로바이옴, 식생활과 습관, 약제들..... 알아야 할 것은 아직 너무나 많고 복잡하지만 가는 길의 방향을 늘 떠올려보자. 암 연구자로서 살아가면서 저 불꽃을, 슬픔의 씨앗을 누그러뜨리는 데 한 톨의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가능하면 더 많이. 더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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