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외래 진료 예약명단을 들여다본다. 한창 항암치료 중이라 2-3주마다 만나는 익숙한 이름들이 먼저 눈에 띈다. 그 다음엔 신환 (병원에 처음 오는 환자)과 초진 (타과를 먼저 보고 우리 과 진료를 처음받는 환자) 으로 분류된 이들이 몇 명인지를 확인한다. 응? 이분은 이름이 익숙한데 초진이네?
클릭하면 정말 처음 보는 환자다. 모월 모일 수술함. 보조화학요법을 위해 의뢰드립니다. 아. 옛날에 봤던 분과 동명이인이구나.
김영자. 최숙희. 박영숙. 이영호. 이런 흔한 이름들은 종종 몇 번을 마주치게 된다. 병명이 다를 때도 있고, 같은 병이더라도 상태가 당연히 다 다른데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자연히 예전 환자가 떠오른다. 수술 잘 되었고 앞으로 항암치료 받으면 완치될 가능성이 높은 김영자씨는 내일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얼마 전에 호스피스로 보내며 작별인사를 나눈 김영자씨는 정말 귀여운 할머니였는데. 그동안 고마웠다며 내 손을 잡던 김영자씨의 젖은 눈이 생각난다. 발그란 볼과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비치던 미소. 진료실에 들어올 때마다 “애구 난 선생님이 너무 좋아!” 하며 뻣뻣한 담당의사에게 애교를 떠실 때 양쪽으로 쭈욱 올라가던 입꼬리.
흔한 이름에 실려서 오는 이미지들은 이름보다 다양하다. 아무래도 오래 만나게 되는 말기암 환자들의 얼굴이 뇌리를 더 많이 스치운다. 그렇게 보면 내일 만나는 새로운 김영자씨에겐 내 기억 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 것이다. 아마 정해진 6개월 치료를 마친 뒤 웬만하면 연1-2회의 만남, '정기검진'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CT 찍고 결과확인을 하러 진료실에 들어오는 1-2분의 시간 말고는 만나지 않는 관계가 우리에겐 좋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말투와 몸짓은 나 말고 그녀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요즘은 마흔에 들어선 내 또래의 환자들이 종양내과 진료실에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십수 년이 지나면 영자, 숙희, 이런 이름들보다는 70-80년대생에게 흔한 이름들이 외래진료환자 명단에 더 자주 반복하여 뜨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김선영씨라던지... 아마도 그 때는, 새로 만나는 김선영씨를 보며 얼마전 세상을 떠난 김선영씨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은 감각들을 기억 속에 저장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어쩌면 흔한 이름들의 미덕일런지 모른다. 세상에 랜덤으로 분포하는, 나와 이름만 같을 뿐인 전혀 다른 사람을 누군가는 나로 인해 기억하고, 반대로 그로 인해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누군가가 힘겨웠던 삶을 마감하고, 또다른 누군가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진료실로 들어온다. 흔한 이름들은 그들의 궤적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수레바퀴에 그어진 생채기같다는 생각을 한다. 비슷비슷한 투병과정의 시작이 다시 돌아왔구나. 그리고 또 흘러가겠구나. 그러나 바퀴가 제자리를 돌지 않듯이, 언제나 다른 위치에 있듯이, 어제의 김영자씨와 오늘의 김영자씨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개성과 마음들을 흔한 이름이라는 연결고리로 매듭지어 언젠가는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게 되겠지.
(위에 묘사된 김영자씨는 가명임을 밝힙니다만 흔한 이름이라 별 의미는 없을 듯 하네요... 흔한 이름의 비애 저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