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의심전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coAzim Apr 09. 2020

임상실험이 아니라 임상시험

서울신문 4월 칼럼입니다. 브런치에는 수정 전 내용을 아카이빙 목적으로 올려둡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415031012


남들은 개의치 않지만 유독 나에게는 괴롭고 거슬리는 무엇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임상실험’이라는 오타이다. 약제나 의료기기 등을 개발하는 과정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실제 인체에서의 효과와 안전성을 검증하는 연구를  일컫는 말은 '임상실험'이 아닌 '임상시험'이다. 그러나 언론, 정치, 과학계를 막론하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임상실험'이라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은 왜일까. 물론 일반인들이 의료인들과 다르게 쓰는 오타는 이것 말고도 많다. ‘폐혈증’이 아니라 ‘패혈증’이며, ‘뇌졸증’이 아니라 ‘뇌졸중’이다.(한편 조금 뉘앙스가 다르지만 '아가씨' '간호원'이 아니라 '간호사'라는 것도 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고 싶다.) 아무튼 그럼에도 임상시험을 ‘실험’이라 부르는 것에 특히 신경이 쓰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ㄹ 자 받침 하나가 있고 없고 차이가 임상시험을 바라보는 인식을 반영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임상시험, 하면 일제시대 자행된 생체실험에서 희생된 이들을 일컫는 '마루타'를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아마 '실험'이라고 혼동하는 것 역시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임상시험에서 시험(trial)의 전제는 연구대상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실험 (experiment)의 가정과는 다르다. 임상시험의 연구대상은 세포주나 실험동물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임상시험을 시행하는 주체는 연구대상인 인간의 인권과 자율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윤리적 원칙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늘 확인하고 확인받기를 요구받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원칙 역시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며, '마루타'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던 2차 세계대전의 경험, 그리고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터스키기 매독연구와 같은 반인권적 '실험'에 대한 반성과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임상시험에 대한 인식은 '실험'을 많이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임상시험이 여전히 '실험'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임상시험이 피험자의 권익을 침해할 위험이 여전히 크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종종 환자들에게 임상시험 참여를 권유드리면 '그거 내 몸 가지고 테스트 하는 거 아니냐' '꺼림직해서 하기 싫다'는 분들이 적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돈이 얼마나 들더라도 좋으니 제일 좋은 치료를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임상시험 참여를 권유하면 거부감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모든 '좋은 치료'는 소수에서만 전용되는 특권이나 비법이 아니라 임상시험을 통해 그 효과를 검증받아 개발되어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편 '임상실험'이라는 말은 소위 증권가 '찌라시'나 경제뉴스에서도 흔히 보이는 단어이다. 임상시험 착수 자체를 유효성 입증에 준한 성과로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아예 적극적으로 일부 신약개발업체의 주가 올리기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임상시험은 '실험'일 뿐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피험자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과 연구자의 과학적 윤리적 고민은 그들이 알 바가 아니고 오로지 그들이 돈을 건 장밋빛 미래만 보일 뿐이다. 

코로나19 판데믹의 시대에 임상시험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지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휴교, 외국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에 대중의 피로와 절망이 쌓이면서 신약과 백신 개발에 대한 소식들은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내과의사인 나도 잘 모르는 항바이러스제 이름들을 일반인들이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이니 말이다. 어쨌든 과학과 의학이 모처럼 관심 받는 기회가 된다면 좋은 것이긴 하다. 하지만 임상연구자로서, 임상시험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더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점이 있다. 

임상시험은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도 아니요, 투자자들에게 잭팟을 터뜨리게 해주는 황금알도 아니다. 임상시험 참여는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의 환자들을 위한 사회적 공헌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최근 코로나19 백신 개발 연구를 위해 먼 거리를 오가며 채혈을 하는 불편을 마다하지 않는 한 완치자의 기사는 우리 모두를 훈훈하게 해주었는데, 그 기사를 보며 나는 우리의 임상시험 참여자들이 좀 더 존경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신약과 백신은 과학자들과 의사들만의 힘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임상시험 피험자 없이 연구는 진행될 수 없다. 그들의 임상시험 참여동기가 더 나은 치료이던, 치료비의 경감이던 간에 임상시험 참여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며,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 인류 공동의 지식을 넓히는 연대의 실천이기도 하다. 더 많은 이들이 기꺼이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나 역시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뽑은 혈액과 나의 건강 정보를 이용하는 임상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마침 세계보건기구가 주관하는, 항바이러스제와 항말라리아제의 조합을 4가지로 나누어 코로나19 확진환자에게 투여하는 임상시험의 이름은  “Solidarity (연대)” trial 이다. 인류의 연대로써 질병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겼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에서 비롯된 임상시험의 역사가 인류를 구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지 기대하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입원 권하는 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