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제 재투여에 대하여
요즘은 코로나19 대응으로 병원도 힘들고 국가도 힘들고 다들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건강보험 진료비 삭감은 더 많이 되고, 병원에서는 삭감을 최대한 줄이고 받아낼 건 받아내자며 의료진들을 재촉하고 있어요.
하지만 의사로서는 짜증이 날 때가 무척 많은데, 대개 건강보험 급여가 안된다 --> 1) 가성비가 떨어져서 2) 의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아서 인데 1)을 환자부담으로라도 쓰려면 수많은 서류작업과 기나긴 기다림 끝에 심사평가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사전신청요법'이라고 하는데 원내 다학제위원회의 승인과 심평원 암질환심의위원회의 승인을 모두 받아야 합니다), 1)인데도 2)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결국 못참고 국민신문고에 또 민원을 내고 말았어요. 오늘 진료봐야 하는 분이 이전에 잘듣던 약을 다시 쓰면 괜찮을 것 같은데 못쓸 것 같거든요. '6개월 룰' 때문에요. 약 끊고 6개월 이상 멀쩡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다시 쓸 수가 없어요. 사실 이 6개월 룰은 어디에도 근거문서에 명시된 바가 없고 심평원 내부 기준으로 보이는데, 삭감에서 일종의 관습법같은 것인가봐요.
예를 들어 전이성 대장암에서 얼비툭스는 한동안 휴약기 이후 다시 투여시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이 보고되어 있어요. 2상연구가 2-3개 정도 있죠. 얼비툭스의 식약처 인정기준에서도 벗어나는 요법이 아니에요. 다만 그 '6개월 룰'을 적용해서 실사를 하기 때문에 비급여로도 쓸 수가 없어요.
한동안 귀찮아서 안했던 민원을 열심히 내봐야겠어요. 그리고 민원과 그 대답도 아카이빙해봐야겠어요. 진정한 민원빌런으로 거듭나겠어요. 오늘 냈으니 어떤 답변이 나오는지 기다려보기로 하지요.
사실 많은 분들이 전문적인 얘기라 관심이 없으시긴 하겠지만 꾸준히 해보려고 해요.
안녕하세요.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종양내과의사입니다.
최근 코로나19로 건강보험재정소모가 많다보니 환자 치료 후 공단에 청구하는 진료비 역시 삭감도 상당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불합리하다고 판단되었던 기준에 의한 삭감 역시 많아져서 이에 대한 요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현재 심평원에서는 이전 암환자에서 항암제 투여를 종료 후 6개월 이상 치료 없이 안정되었던 상태가 아니면 그 약제를 다시 재투여하는 것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즉 효과가 좋았던 약제로 다시 투여할 때 역시 좋은 반응이 기대되는 경우에만 급여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것 자체는 합리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약제의 경우에는 6개월 이상 유지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즉 2-3개월 정도만 유지 후 암이 진행했다던지, 심지어 치료 중 암이 진행하였던 약제이더라도 일정기간의 휴약 후 재투여하는 경우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저의 개인적 주장이 아니라 학계에서의 consensus 이며 객관적인 임상시험 데이터도 있는 상황입니다. 대표적으로 폐암에서 gefitinib, erlotinib의 재투여, GIST에서 imatinib, 대장암에서 cetuximab 이나 oxaliplatin, irinotecan의 재투여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 경우는 아무래도 6개월 이상 치료효과가 유지되었던 경우에 비해 비용효과는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급여인정까지 바라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준을 비급여 투여에도 적용하여 병원 실사 시 적발되면 환수조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저희 의사들은 이러한 치료를 본인부담으로라도 받고 싶은 환자분들에게 쉽사리 처방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 이상 치료기회가 없는 환자들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여기준은 건강보험의 재정을 비용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준이지 의학적 판단기준이 아닙니다. 이것을 비급여 치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판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