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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Oct 15. 2016

부고

외할머니를 하늘로 보내며 (2) 


'할머니 돌아가셨다' 

중환자실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 앞에 회진을 하려고 서 있었던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가족 단톡방에 짤막한 부고가 떴다.  

결국 가셨구나. 

할머니가 우리 병원에서 위루관을 교체하고 인근의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이후, 엄마는 며칠에 한번씩 '할머니 위독하시대' '기관삽관을 해야 할까?' '투석을 하는게 도움이 되나?' 이런 질문들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내가 엄마라면 안할거야' 

'그래 나한텐 그런거 할 필요 없어. 튜브도 꼽지마. 그런데 엄마(외할머니)한텐... 어떻게 해야하지?' 

내 답은 의사결정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은 돌아가시기 전 투석을 두어 번 하셨다고 한다. 혈액을 빼내어 노폐물을 걸러내고 다시 넣어주려면 굵은 크기의 카테터가 필요하다. 목에다 넣었을까, 사타구니에 넣었을까. 그다지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환자라면, 비교적 손쉽지만 감염이 쉽게 되는 사타구니의 대퇴정맥에 넣었을 확률이 높았다. 말 못하고 눈 못맞추는 할머니는 아기처럼 누워 음부를 드러내고 시술을 받아야 했겠구나. 비교적 매끈했던 피부도 반복되는 혈액검사에 시달려 부어있었겠구나.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면 외삼촌은 투석 동의서에 서명을 했을까. 

공고롭게도 부고를 받았을 때 눈 앞에 누워있던 환자는 갑작스러운 감염증의 악화로 패혈증성 쇼크와 급성신손상이 발생하여 투석을 하려고 중환자실에 내려온 분이었다. 40대 남자는 의식이 혼미했다. 4기 대장암으로 진단받았지만 항암치료를 시작도 해보기 전에 발생한  패혈증이어서 어떻게든 회복시켜서 항암치료라도 시작해보는 것이 목표였다. 가능성이 낮아도 명확한 목표가 있는 경우에 의사는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 자신도 망설이면서 환자나 가족에게 선택을 미루는 것은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는 얘기다. 투석을 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알고 있다. 외삼촌은 촛점없는 눈을 끔뻑이고 있는 어머니의 대뇌피질 어느 한구석에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투석을 해서라도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다. 의사는 그런 생각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것에 기대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즉 ‘환자가, 또는 가족이 원하여’라는 이름으로 부족한 정보와 인식에 근거해 결정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툴가완디의 에세이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원제 "Complications')에서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환자들이 의사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자기결정권 그 자체가 아니라 실력과 친절이다. ….(중략) 친절은 환자들이 자기 결정권 행사를 원치 않을 때 부담스러운 결정을 대신 맡아서 해 주는 것 까지도 포함하며, 그들이 결정을 하고자 할 때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불신이 극에 달한 요즘, 의사들은 가능하면 결정을 하는 것을 꺼린다. 환자와 가족에게 여러 옵션을 주고 선택하게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기 위해서’이고, 실질적인 이유는 나중에 “왜 이렇게 했느냐”는 비난을 뒤집어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의사와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도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방어기제일런지 모른다. 

그래서 할머니가 결국은 투석을 하고 돌아가신 것은 이 불신의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는지 모르겠다. 시신에는 위루관이 박혀있던 구멍과, 투석카테터가 박혀있던 또 다른 구멍이 나 있을 것이다. 영혼만이라도, 안식을 취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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