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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그리고 예의와 윤리

장강명, “책, 이게 뭐라고” 와 팟캐스트 책걸상

by OncoAzim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 이라는 프로젝트가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주도로 페이스북에서 진행되고 있다. 예전엔 스스럼없이 썼지만 은연중에 차별을 내포하고 있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단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프로젝트이다. 초대필자가 쓴 글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여배우, 여류작가' '결정장애' '주린이' 등의 표현에 담긴 여성, 장애인, 어린이에 대한 비하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들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슬아 작가가 쓴 '투병'이라는 단어는 약간 다르다. 그 자체로 환자를 비하한다는 느낌이 덥썩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환자의 삶을 표현하는 데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던 나로서는 반가운 글이었다. 동료작가가 '투병' 대신 '치병'이라는 말을 쓰는 데서 얻은 느낌을 서술하는 부분이 좋았다.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여러 면모가 그 단어에 포함된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투병보다 치병이라는 말을 소중히 아끼게 된다. 누군가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를 더 신중히 말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치병'은 쉽게 입에 붙지 않는다. '유모차' 대신 '유아차' '자궁' 대신 '포궁'이 입에 잘 안맞는것과 마찬가지다. 언어의 사회성은 무시하기 쉽지 않다. 그 언어의 맥락과 별개로 언어의 표현력과 다양성의 힘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아마도 '책, 이게 뭐라고'에서 장강명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일 것이다. 그는 말하기에서는 예의가, 글쓰기에서는 윤리가 필요하고 그 둘을 혼동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데, 나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이 부분을 읽었지만 이해가 될 듯 말 듯 하다.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나 그 가족 앞에서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무신경하거나, 무례하다. 그러나 그것을 비윤리적이라고 여겨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예컨데 인터넷 공간의 모든 사람에게, 앞에 없고 그가 모르는 암환자 가족이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돌겠네, 미치겠네, 죽겠네'라는 표현은 어째서 허용하는가? 신경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과 그 가족, 최근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족들의 상처는 왜 살피지 않는가?"

최근 들은 팟캐스트 '책걸상'에서 호스트인 박재영, 강양구가 이 부분(예의와 윤리를 구분해야 한다는)을 극찬하는 것을 듣고 나는 솔직히 이 팟캐스트 시즌 3를 재개하는 데 5만원이나 후원한 것이 순간 좀 아까웠는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가치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요구에 대한 피로를 많이 느끼는 중년남성에 대한 피로를 평소에 많이 겪고 있어서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여성들과 비교하자니, 예의와 윤리에 대한 고민의 진정성은 알겠지만 짜증이 확 치솟는, 뭐 그런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 아이들과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함께 보며 '얘는 왜 이렇게 노숙자처럼 누워있니'라며 낄낄거렸던 나는 또 어떤가. 그건 노숙자 비하가 아닌가. 장강명의 글에 따르면 말로 주고받는 맥락 속에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괜찮은 것일까. 혹시 아이들이 노숙자를 대책없이 길가에 널부러지는 사람으로 타자화해서 생각하게 되면 어떡하지. 말이 아니라 글로 표현된 '노숙자 같다'는 어떨까. 인기 팟캐스트 중 하나인 '영혼의 노숙자'가 혹시 노숙자를 비하한다는 비난을 받아보지는 않았을까(한때 정말 궁금하긴 했었다) 그러면 그 경계는 무엇일까. '예의'와 '윤리'라는 단어로 구분해도 그 경계는 좀처럼 명확해지지 않는다.또한 작가가 이야기하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하는 윤리라는 것이 이 부분에 적용되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성희롱같이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을 위주로 판단해야 할까? 사실 작가가 예로 든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불편해할 사람들은 많고 일단 암환자를 자주 만나는 나는 특히 무척 불편하다. 그러면 '노숙자'라는 표현을 불편해할 사람은 대개 노숙자일텐데 그들은 보통 발언권이 무척 제한되어 있다. 그들의 불편한 감정이 사회에 잘 드러나지 않고 다수가 아니니 ‘노숙자같다’는 말은 별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쓸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은 무엇일까?

내 생각엔 결국은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는 것 같다. 말하기이던 쓰기이던. 말하기에선 허용되지 않아도 쓰는 건 괜찮은 언어란....내 생각엔 거의 없지 않나 싶다. 다만 네 가지 정도 착안할 점이 있지 않나 한다. 1) 언어가 만들어내는 차별과 편견이 유의미한가 2) 그 차별과 편견을 받는 당사자는 어떻게 느끼는가, 3) 그 언어는 반드시 그 상황과 장소와 맥락에서 써야 했나. 대체 가능하지 않았는가 4) 그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만으로 인성이나 사고방식을 통째로 재단하려 드는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나 정도이다. 장강명 작가가 팟캐스트 여성 스태프들에게 당했다는 놀림, 에로비디오 회사명을 별명으로 얻은 것은 성희롱인가 아닌가. 그를 에로비디오를 밝히는 색마로 몰아부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성희롱일 것이다. 물론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판단은 상당히 다르겠지만 내가 남성들에게 그런 별명을 얻었다면 분명히 성희롱이라 느꼈을 것 같다. 2) 당사자의 느낌이 중요한 예이자 사실 굳이 그런 별명을 붙였어야 했나 싶은 3)의 예이다. 그러나 한편 나는 '자궁' '유모차'라는 말을 씀으로서 가부장적인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는 명예 남성이라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고 여성으로서 그 단어로부터 비하당하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물론 언어는 생각의 거울이자 관념을 규정하지만, 원래의 한자 뜻보다는 신체 장기와 육아 도구를 지칭하는 기능적 의미가 더 큰 단어들을 대체하고 언어의 사회성을 희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3) 대체가능성의 예이다. 노숙자의 경우 1)이 좀 애매하다고 본다. 2)는 궁금하다. 아직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단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노숙자들이 차별받는 예가 많아지고 그들의 목소리 또한 커진다면 1) 2)의 기준에서 자제하거나 사라져야 할 표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암 걸리겠네'는 1) 2)의 면에서 대개의 경우 부적절하다고 본다. 3)의 측면에서도 점수을 주고 싶진 않다. 그리 미학적 언어가 아니다, 내가 보기엔. '죽겠네' '미치겠네'는 1) 2)의 예에서 애매하다. '자궁'과 '유모차'와 마찬가지로 말 그대로의 뜻보다는 의미 전달의 기능적 의미가 더 크므로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약 장강명 작가가 만약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에세이에서 썼다고 해서 그의 작품 전체와 거기 담겨있는 그의 세계관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 그러나 누군가에게 정말 불편한 표현이라면 조용히 귀뜸해주는 정도의 4)가 중요할 것 같다. 혐오를 거둔답시고 또다른 혐오를 낳는 것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이미 보았던 바다.

사실 '암 걸리겠네'는 왜 안되고 '죽겠네, 미치겠네'는 왜 되느냐는 질문은 장강명작가가 책 속에서 (말보다 글로 주로 소통하는) '진지한 인간들을 공격하는 쉽고 파괴적인 방법은 그들의 핵심인 일관성을 역이용하는 것'을 정작 본인이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종종 이야기했던 여러 딜레마에 공감하고 그 질문을 하는 마음도 알 것 같으며 책걸상을 진행하는 두 빌런들도 기본적으로는 좋아하기 때문에 결국은 4)를 실천하며 5만원 후원한 것은 굳이 후회하지는 않기로 한다.

게다가 과거 책, 이게 뭐라고’ 팟캐스트의 애청자로서 우연히 접한 이 책은 뜻하지 않은 선물이고 (진정한 애청자라면 물론 출간즉시 샀어야 마땅하나 유튜브로 건너간 이후 급관심떨어진 이후라...) 막쓴 것 같아도 여러 소재와 생각이 정교하게 연결되는, 앰비규어스컴퍼니의 춤 같은 장강명의 에세이를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라 역시 방송 듣고 책산 것도 후회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이제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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