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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밴

정치의 일과 의사의 일

by OncoAzim

요즘은 넷플릭스의 <크라운>을 정주행한다. 시즌3는 아마 작년 초에 나왔던 모양이다. 띄엄띄엄 보다가 어제는 시즌3 3화 "애버밴"을 보고 눈물 콧물 다 흘렸다.

애버밴(Aberfan)은 구글지도에서 검색하면 "애버판"이라고 나오는 영국 웨일스의 한 지역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사진이 Disaster Memorial Garden의 무덤. 재난 희생자들이 묻힌 곳이다. 탄광에서 나온 쓰레기더미로 이루어진 산이 폭우로 붕괴되며 학교와 마을을 덮쳐 총 144명이 사망했고 이중 116명이 7-10세 사이의 어린이였다고 한다. 재난 직후 정치권이 천재지변이라 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정파간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 위험신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누적된 부조리, 현장방문을 망설이는 지도자, 이 모든 것이 세월호의 비극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드라마 초반에 나오는 아이들의 들뜬 모습, 노래 연습을 하며 주말을 기다리는 천진난만함이 수학여행 직전의 단원고 학생들과도 겹쳐 보여 마음이 무너진다. 한편으로는 위기에서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지는 정치라는 것이 언뜻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의사의 일과도 비슷해보여서 마음에 남는 대사들도 있었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해럴드 윌슨 총리가 사고 당일 여왕의 비행기를 빌려 현장으로 가는 장면이다. 이 비극이 예측하지 못한 폭우로 일어난 일이며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보좌진의 말을 그는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라며 일축한다. 1960년대에 벌어진 이 사고가 그나마도 세월호보다 나았던 부분은 총리의 태도인 것 같다. 물론 그 또한 극 중후반에는 어떻게든 재난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모습도 보이지만, 어쨌든 사고 당일 달려간 것은 맞다.

세월호 사고 당시 집권층 정치인들은 "교통사고일 뿐" "재난의 컨트롤 타워는 청와대가 아니다"라는 발빼기 식 언사를 남발했고, 그것들은 정치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불신과 트라우마를 남겼다. 사실 그 때 나는 같이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그들의 말에 공감이 가는 점이 없지 않았고 그게 또 양심의 가책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사망하는 책임을 모두 의사에게 묻고 싶어하는 보호자에게 의사는 "예측할 수 없었다" "병의 경과일 뿐" "의사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다"라고 흔히 말한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 말이 불러오는 분노와 원망에 어처구니없어 하기도 한다. 보호자의 막무가내식 성격이나 무지 탓으로 돌리면서.

그러나 당시 정치인들의 말을 들으며 내가 했던 말들을 되돌아보면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말은 병원버전으로 말한다면 "환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의사의 일이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에 책임을 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책임감 있는 태도는 필요하다. 내 탓이 아니라는 선을 먼저 긋는 것보다는 말이다. 의료에서의 불확실성을 약간의 예측가능성으로, 어쩔 수 없는 병의 경과를 약간은 어쩔 수 있는 일로 만들어가는 것이 의학연구와 진료의 질 향상 및 환자안전을 위한 행정 이고 이런 것들은 결국은 책임감에서 나온다. 많은 경우 말은 행동과 태도를 규정하고 디테일을 바꾼다. 그리고 매일매일이 재난인 병원에서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군주는 그런 것 안해요"

현장에 가서 주민들을 위로해달라는 총리의 요청을 여왕은 거부한다. 내가 나타남으로서 구조현장을 마비시키고 싶지 않다. 위로를 하라니 쇼를 하라는 말인가. 군주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라며. 일견 생각하면 합리적이다. 가서 일에 방해나 되지 내가 가서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되겠는가.

얼토당토않은 비유일런지 모르지만 전공의들을 두고 일을 하는 대학병원의 전문의로서도 가끔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입원 환자가 상태가 좋지 않다. 할 수 있는 치료는 모두 하고 있고, 전공의가 열심히 보고 있는데, 내가 가면 괜히 방해만 되는 건 아닌가. 지금 또 가서 환자를 보면 전공의가 하던 일을 제쳐두고 회진을 따라와야 하니 부담스러워할 지도 모른다. 치료가 달라지면 모르겠는데 그럴 상황도 아니라면, 그냥 내가 환자 한번 더 봤다 하는 쇼만 하는건 아닐까. 의사는 병실에 진료를 하러 가는 거지 문안인사를 하러 가는게 아니잖아. 그런데 사실 가기 싫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거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안다.

의사의 권위가 뭐 대단하다고 군주에 비유하나 싶기도 하지만, 환자가 되어보면 알 것이다. 의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환자에게 주는 무게는 군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목숨의 무게가 무거워서이다. 사실은 그 무게가 무거워서 의사도 자꾸만 피하고만 싶다. 그 무게를 같이 짊어지기보다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도와주는 객관적인 조력자이고 싶다. 괜히 병실을 자주 들락거리다가 적대적이거나 말이 많은 보호자를 만나서 싫은 소리를 듣는 것도 싫다.

그러나 절망한 주민들에게 여왕만이 할 수 있던 위로가 있었다. 환자에게는 의사, 특히 치료에 대한 최고결정권자인 전문의만이 줄 수 있는 위안이 있다. 그것은 쇼가 아닌 권위의 적절한 사용을 통한 심리적 안정이다. 간호사나 전공의가 아무리 환자를 꼼꼼하게 잘 봐도 전문의가 관심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으면 환자는 본인이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은 환자의 몸이 아무리 잘 회복되었다고 해도 일종의 치료의 실패가 아닐까 싶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환자에게 무뚝뚝해도 치료를 잘 하는 의사를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다. 반대로 환자와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실력보다 ‘구라’에 가깝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끔 만나는, 동료들도 인정하는 좋은 의사는 거의 예외없이 실력과 ‘구라’를 모두 갖춘 사람들이다. 질병의 치료가 신체의 회복 뿐 아니라 돌봄을 통한 마음의 회복까지를 포함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문안인사에 지나지 않을 회진은 그저 보여주기만은 아니지 않을까. 여왕의 표현을 빌어 약간 비틀자면 A good doctor does do that. 좋은 의사는 환자의 치료과정에 큰 영향이 없어보이는 쇼맨십도 기꺼이 보여주는 사람일 것이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대신 우리 자신에게 솔직할 순 없죠”

여왕은 총리의 요청을 거부하지만, 현장에 다녀온 이들이 전하는 참혹함에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정치적 공격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상황이 되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고 후 거의 1주일이 지나 애버밴에 다녀온 후 총리에게 말한다. 눈물이 나지 않았으며,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들키기 두려웠노라고. 총리는 자신 역시 특권계층의 취향을 더 선호하지만 노동자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본가의 상징인 시가 대신 좀더 서민적인 파이프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언론에 더 자주 비추는 이중성이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이중적인 모습이더라도 여왕이 줄 수 있는 위로를 그들에게 주었다면 된 것이라고 말한다.

파마를 새로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곧 돌아가실 것 같은 환자가 입원하면 미용실에 가는 것을 미루었었다. 생명이 다해가는 환자 앞에서 헤어스타일 변신을 시도할 수는 없었으니까. 환자가 임종할 때는 가끔 울 때도 있지만, 그 후엔 다소 가벼운 마음이 되어 미용실에 간다. 그럴 땐 죄책감이 들어 가지 않던 성당에 가서 미사도 보지만 그때 뿐이다. 암환자들을 주로 보시니 힘드시겠어요, 라고 누군가가 말을 건네면 힘들죠, 특히 마음이, 라고 말하며 속으로는 찔린다. 아뇨, 나는 내 일상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고 그게 나에게 가장 중요해요. 그들의 비극은 내 비극이 아니니까요. 매일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눈물이 유난히 많은 것이 걱정인 사람이지만 가끔은 여왕처럼 나는 냉혈한이 아닐까 되돌아보기도 한다.

타인의 비극에 100%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의료인들은 "당신 가족이라고 생각해보세요"라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호소에 난감함을 느낀다. 그렇게 감정이입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요구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적당히 공감해주는 말을 건네고 적절한 표정을 짓는 것, 환자의 임종을 눈앞에 두고 머리를 새로 하지 않는 것은 '구라'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중적인 모습이더라도 할 일을 하면 된다는 윌슨 총리의 말은 약간의 위안이 된다. 내가 이 상황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공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아이들을 잃은 애버벤 유족들의 노래를 듣는 여왕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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