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le Zauner, 2021
Crying in H mart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인디뮤지션 Michelle Zauner 가 지난 4월에 출판한 회고록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의 세계와 그녀의 문화를 탐색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았다. 2018년 H 마트에서 어머니의 자취를 마주하고 울어버렸다는 동명의 에세이가 뉴요커에 실렸을 때 나는 앞부분만 약간 읽었었다. 그 때는 그녀가 “full Korean”인 줄로 알았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그래서 집안과 바깥 간의 언어와 문화의 충돌과 혼란은 있어도 적어도 가족 안에서는 문화적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Kim’s convenience”에서 드러나는 가족애의 슬픔 버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어머니만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업차 한국에 왔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 후 미국에 정착하게 된 그녀의 어머니는 재미교포들이 흔히 다니는 교회에도 가지 않았고, 주변에 한국인 친척이나 가족도 없었다. 한국식료품점이나 한국식당에 즐겨 가고 그녀를 한글학교에 보내기도 했지만,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한인교회에 다니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던, 아마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던 여성이었던 것 같다. 이국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인 셈이다. 그만큼 그 딸의 경험 역시 모성과 문화에 대한 한층 더 외롭고 간절한 서사가 되었다.
한국음식과 절반의 정체성
영어로 표현되는 한국 음식의 질감과 식감은 새롭다. 김치는 “perfectly sour” 해야 하고, 삼겹살은 “perfectly crisped” 해야 하며, 찌개는 “piping hot” 해야 한다는, 먹는 것에 진심 (reverence for good food)인 Korean appetite를 가진 아이로 자라났다는 문장에서 한국인이라면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음식은 그녀에게 그리움과 친숙함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밀어내는 무엇이기도 했다. 항암제주사를 맞은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 어머니에게 그녀의 요리솜씨로는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줄 수 없었고, 한인마트에서 오뚜기 크림스프를 사다주는 것이 전부였다. 조지아에서 날아온 어머니의 지인이 콩국수, 잣죽, 미숫가루 등으로 어머니의 입맛을 살리려 노력하는 동안 어머니가 먹은 음식들의 칼로리를 계산하고 기록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사춘기 때는 어머니가 싸주는 한국식 도시락을 거부했고, 아시안 관광객처럼 보일까봐 사진을 찍을 때 v 사인을 하지도 않았으며, 어머니의 이름을 딴 정미라는 middle name 역시 없는 것처럼 굴었던 그녀는, 어머니를 온전히 돌보기 위해 다른 어느 때보다도 한국인이 되고 싶었지만 자꾸 내쳐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두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었다 (I could never be of both worlds, only half in and half out)’는 그녀의 절규는 착잡함을 느끼게 한다. “half in half out”은 뿌리깊은 제 1세계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늘 동경의 대상이다. 분단과 질척이는 관습과 지겨운 획일과 경쟁으로 얼룩진 반도에서의 자유는 저세상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꿈이다. 한국인과 제1세계 백인과의 국제가정은 ‘이중언어환경'이라 부러워하기도 하며,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혼혈인의 이국적 외모는 아름답다 여겨진다 (저자 역시 어렸을 때 한국에서 연예계 데뷔 제안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세계에 반만 발을 담그고 있는 자유는 어느 세계에도 편하게 발을 디딜 수 없는 슬픔이며, 어머니가 먹지 못하는 계란찜을 만들고 느끼는 좌절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준다.
이러한 절반의 정체성으로 인한 고통은 어머니의 임종 후 한국음식과 문화를 섭렵하면서 치유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듯 하다. 재미 한식 유튜버인 망치의 동영상을 보고 따라서 만든 잣죽의 목넘김을 음미하는 문장은 감동적이다. “항암 후 구내염으로 벗겨진 엄마의 혀를 코팅하던 부드러운 액체를 떠올리며, 나는 마지막 죽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넣고 눈을 감았다. 따뜻한 액체가 나의 위장으로 천천히 흘러들어가고, 나는 그 뒷맛을 음미했다.” 집에서 김치를 담그고, 한인 사우나에 가서 때밀이 아줌마에게 때를 밀고, 찜질방에 들어가 어머니의 자궁같이 아늑하다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질병과 죽음의 모습
어머니의 암 투병과정은 미국 동서부와 한국을 오가며 전개된다. 워싱턴 주 유진이라는 소도시에 거주하던 어머니는 MD Anderson에 2차 의견을 구한 뒤 오레곤에서 항암치료를 받지만, 1차 이후 극심한 구토와 탈수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병명은 담도의 평편상피세포암으로, 담도암이 서양에 비해 흔한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드문 암이다. 3제 항암요법을 권유받고 진행하게 되는데, 대개는 2제요법을 추천하는 것이 보통임을 고려하면 좀더 적극적으로 치료하려는 의견을 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약의 종류가 많아지면 구토, 구내염, 발열같은 부작용은 당연히 더 커지게 되고, 또한 인종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용량감량 없이 투약하여 부작용을 더 심하게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일본에서 사용하는 항암제 용량은 서구권 국가에 비해 다소 낮다.)
그 고생을 하며 맞은 약이 전혀 듣지 않았다는 소식을 저자가 미 동부 공연 투어를 위해 집을 떠나있는 동안 전해 듣고 오열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는 한국어로 “괜찮아, 괜찮아" 하며 오히려 딸을 위로한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생의 마지막 한국행을 강행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발열로 한국의 병원에 입원해서는 패혈증과 저산소증으로 다시 한번 고비를 맞게 된다. 오레곤에서보다 한국 의사가 더 친절하고 환자를 오래 봐 주었다는 대목을 보고선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운이 좋아 좋은 전공의를 만났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영어로 잘 설명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던 한국의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재미교포의 아들에게 더듬거리며 영어로 설명하던 과거의 내가 떠오르기도 했다. 보험이 없어 한국에 와서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상태가 빨리 나빠져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분이었다. 영어로 유창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것보다는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매듭짓고 돌려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이 늘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어머니의 죽음의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 부분에서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 <내 아내에 대하여>에서 묘사된 비통한 임종과정이 연상되기도 했다. 가정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통증조절은 여전히 어려웠고, 막바지에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는 어머니의 숨을 느끼는 초조함과 메마른 마음은 겪어본 사람만 아는 고통이다. 어머니의 임종 직후 자신이 이 모든 풍경을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 겪는 이인증 (depersonalization) 증세로 보이고, 나도 아버지의 임종 때 겪었던 증상이다. 저자는 트레버노아와의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쓴 것이 자신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질병과 임종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 나 역시 아버지에 대해 비슷한 책을 쓰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이라 주된 돌봄제공자로서 바라본 죽음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어머니를 간호하며 자신이 기대고 머물렀던 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 기록에는 좀더 구체적인 슬픔이 치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Umma, 그리고 Mom.
“그녀는 내가 태어나 처음 배운 단어이자 두번째로 배운 단어이기도 했다. Umma, 그리고 Mom.”
그녀의 어머니는 희생적이고 포용적인 모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유년시절엔 좀더 자녀에게 친절하고 공감해주는 백인 엄마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녀에게 울음을 그치라며 “니 엄마 죽을 때나 그렇게 울어라"는 한국엄마 특유의 독설을 날리기도 한다 (영어로 표현되니 좀 웃겼다. “Save your tears for when your mother dies”). 이는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저자가 떠올린 문장이기도 하다. 외모와 옷차림에 대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고, 음악을 하겠다는 저자의 꿈을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로 사정없이 짓밟는, 어쩌면 좀 징그러울 정도로 전형적인 한국엄마다. 그래서 사실 한국사람이 이런 이야기, 음식을 통해 어머니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쓰면 ‘어머니의 손맛' 운운하는 다소 뻔한 에세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은 저자의 인종적 정체성 및 예술과 삶에 대한 고민과 함께 마치 소설같은 상황과 심리의 묘사, 음식과 문화에 대한 섬세한 서술로 일종의 문학적 성취를 거둔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만약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오면 “사모곡" 어쩌고 하는 K감성 풍부한 홍보문구와 함께 팔리지 않을까 생각하니 저절로 표정이 짜게 식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침 나는 지금 코로나 시국에 미국에 연수를 와서 삼시세끼 밥을 해대느라 매주 H마트에 들러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 이 책 속의 한국음식 예찬에는 더없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성이어서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식탁에 대한 책임감을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내 아이들에게 어떤 음식, 어떤 말투, 어떤 손짓과 몸짓으로 기억될 것인지를 떠올려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도 뻔한 모성이라는 클리셰의 힘을. 그리고 내게 너무나 익숙한 세계인 그 단어가 주는 위안과 슬픔을. 엄마. 보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