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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Oct 22. 2016

연도(煉禱)

외할머니를 하늘로 보내며 (4) 

 가톨릭 신자가 임종하면 신자들이 와서 ‘연도’라는 기도를 한다. 요즘은 '위령기도'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성서의 시편에 나와있는  구절을 여럿이  소리내어 합창하듯 부르는 것인데, 노래는 아니지만 일정한 리듬감과 음의 높낮이가 있다. 사실 처음 들으면 좀 낯설기도 하고, 가톨릭 의식이라기보다는 샤머니즘에 가까운... 뭐랄까 굿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나온 한 신부님의 말씀을 빌려서 설명한다면, “시편 기도문에 화음이 들어가지 않은 단성의 가락을 붙여 창을 하듯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외래 전통을 우리 문화 안에 받아들이며 만들어낸 독특한 예식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65


연도를 하는 것을 나는 아빠의 빈소에서  처음 들었다. 아빠는 원래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암 진단을 받은 후 세례를 받았다. 우리가 다니던 동네 성당의 교우들 중 열심인 사람들이 대부분 교대로 다녀가며 연도를 해주었다. 우리와 친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잘 모르고 얼굴만 아는 이들도 있었다. 미사에 가면 늘 앞에 나가서 해설을 하거나 성가대를 이끌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연도를 지휘하고 열심히 기도해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이롱 신자에 가까운 우리 식구들을 위해서 몇 번이나 다녀가며 입이 아프게 연도 기도문을 외웠던 그런 이들을 움직였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고마우면서도 의아하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건강하실 때 성당 교우들과 함께 여러 빈소를 돌아다니며 연도 봉사를 하셨다고 한다. 보통 한번 하는 데 30분-1시간 정도는 걸리고 꽤 지치는 일인데, 그걸 모르는 사람의 빈소까지 찾아가서 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자기 가족을 돌보고 챙기는 것이 전부였던 늙은 주부는 누군지도 모르는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일로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찾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엄마는 그걸 다 했던 할머니가 정작 본인 장례식에선 연도를 해 주는 사람이 없음에 서글퍼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거동이 어려워지면서 성당에 나가지 못한 지는 꽤 되었기 때문에, 할머니를 기억하는 교우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다니셨던 성당과 빈소가 가까웠다면 기꺼이 와줄 만한 사람들이 있긴 했을 것이다, 날라리 신자인 우리에게 예전의 그들이 해주었듯이. 그러나 할머니는 재작년 20년 넘게 살았던 일산을 떠나 양평의 외삼촌 댁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이후 여러 합병증이 생기면서 몇 군데의 병원을 옮겨다니며 입원하시다가 돌아가시면서 빈소는 내가 다니는 서울 동쪽의 병원에 마련이 되었다. 할머니를 기억할지 말지도 모르는 이전 성당 교우들에게 연도를 해달라고 일산에서 여기까지 오라고 부르는 건 불가능했다. 

병원 천주교 원목실에서 연도를 조금 해주기는 했는데 엄마가 이모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고 당혹스러워하시는 듯하다. 

“우리 애아빠한테 교우들이 연도해줄때도 본당에 돈을 내긴 했지만...그건 형편에 맞춰서 감사의 표시로 성의껏 내는 거였지 얼마라고 정해놓진 않았거든. 그런데 여기(원목실)선 연도해주는거 얼마라고 딱 정해놓데… 조금 당황스러워하니까 형편이 안좋으시냐고 조심스레  묻긴 하더만. 뭐 그런 건 아니라고, 그냥 그만큼 낸다고 했는데 왠지 돈내고 연도받는 것 같아서 좀 그래….”

그나마도 연도를 해주는 사람들이 일정이 바빠서 얼마 해주지도 못했다며 불만이시다. 이 큰 병원에서 봉사자들에 대한 수요는 넘쳐나기 마련이라 어쩔수 없기는 하겠지만... 

연도를 해주고 돈 받는 걸 가지고 뭐라 할 순 없다. 원목실 운영도 돈 없이는 해결이 안될텐데, 여느 본당처럼 주일미사에서 헌금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닐 것이고 연도봉사를 통한 수익구조(?)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다만, 그냥 슬펐다. 낯모르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던 할머니가 마지막 몇 년을 의식없는 몸뚱아리로 살아가며 삶의 터전에서 멀어져야 했고 소속되었던 공동체의 애도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병원 원목실의 서비스로 이루어지는 정액제 연도를  받으며 영혼의 안식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러나 외삼촌과 엄마, 이모들은 여느 현대의 가족들과 같이 뿔뿔이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가 살아왔던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할머니를 돌볼 재간이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의 최선의 죽음이란 결국 이런 방식인가, 싶어 마음이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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