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미술관 (MFA: museum of fine art) 앞에 서 있는 이 동상 <위대한 영혼에의 호소: Appeal to the Great Spirit> 은 보스턴의 조각가인 사이러스 E. 달린(Cyrus E. Dallin)의 1909년작이다. 원주민의 권익옹호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말을 타는 아메리칸 인디언 조각상을 주로 만들었고, 그의 작품은 상당수가 공공미술로 쓰였다고 한다. MFA 임원진은 지역의 미술가를 후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헌팅턴 애비뉴로 향하는 미술관의 입구에 이 동상을 1912년부터 세워두었는데, 애초에 영구히 세워두려는 목적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마 기간 한정 프로모션같은 것이었겠지. 그러나 그 이후 이 동상은 계속 MFA 앞에 서 있게 되었고, 결국 이 미술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동상을 보았을 때 나는 왠지 모를 쎄한 느낌이 들었지만 남편은 오 멋있네 하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도 동상 사진을 찍었지만, 동상 밑에 있는 설명을 대충 읽고는 다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 쎄한 느낌과 통하는 것도 같아서 이것도 찍어두었다. 그리고 다녀와서 미술관 홈페이지를 찾아서 이 작품과 관련된 내용을 조금 더 읽었고, 동상의 복장, 포즈, 의미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많은 이들의 반응은 남편의 그것과 동일할 것이다. 대자연을 가슴에 받아안는 듯한 인디언 원주민의 포즈는 자유를 상징하는 듯 하다. 많은 이들이 이 동상을 좋아했다. 그러나 원주민 출신 주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이 동상은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단 복장이 요즘 시쳇말로 표현한다면 ‘끔찍한 혼종’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한 부족이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지역에 산재하여 살았으며, 한 지역에서도 여러 부족이 공존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동상의 복장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보기에 여러 부족의 복장이 뒤섞여 정체를 알수 없는 이상한 스타일이었다. 동상의 남자가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는 북아메리카의 라코타 족의 머리 깃털장식과 남서부 아메리카의 나바로 족의 목걸이를 닮았지만 그 어느 부족에도 가깝지 않았던, “원주민 문화에 대한 백인들의 환상 (White fantasy of native culture)”에 불과했다. 또한 박제되어버린 듯한 크게 뜬 눈과 벌린 입, 마른 얼굴,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듯 체념한 듯한 표정, 무방비로 드러난 가슴 같은 동상의 모습은 유럽인들에게 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가며 사라지고 있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아메리칸 원주민을 “vanishing race”로 일컫는, 일종의 문화적 밈을 충실히 표현하는 작품인 것이다. “vanishing race”는 원주민들이 그들보다 우월한 유럽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멸종된다는 Social Dawinism에 기초한 관념이다. 마치 멸종위기종을 바라보듯 아메리칸 원주민 문화를 대상화하는 이런 사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특히 매사추세츠 지역에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있다.
MFA 블로그에는 2017년 미술관의 큐레이터 인턴으로 일했던 하버드대 미술사 박사과정학생이자 원주민 출신인 조셉 조단이 이 작품에 대해 쓴 에세이가 실려있다. 그는 인턴으로 일할 때 매일 지나쳐가던 이 동상이 문명 앞에 사라져가는 원주민의 슬픔을 표현한 듯 보이지만, 정작 원주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사라지지 않고 살아오며 싸워왔고, 이런 정형화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상품화되고 원주민 공동체의 정체성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계속 이야기해왔다고 말한다.
남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아직 이 동상을 사진찍고 즐기며 작품 설명을 애써 읽어보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나도 모든 작품들의 설명을 다 읽진 않으니까. 또한 예술작품은 그 배경에 대한 선입견 없이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즐길 필요가 있기도 하다. 그것이 예술의 효용가치이자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것이 이 동상이 여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런 반성적인 작품 설명이 동상 앞에 적히고 조셉 조단의 에세이가 블로그에 실리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추측해본다. 미술관의 백인 학자나 백인 큐레이터가 스스로 각성하여 이런 설명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셉 조단을 비롯한 원주민 출신 주민들이 아마도 여러 번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넌 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다니니. 너는 왜 깃털장식을 머리에 쓰지 않니, 왜 말을 타지 않니’ 하는 말이 지겨웠을 것이다. ‘난 전시되는 원주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야, 그런 말은 불편해’ 라고 외쳤을 때 그 말이 쉽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니, 너는 너희 전통 문화를 자랑스러워하고 지키고 싶지 않아?
너희 문화를 부정하는거야?
(저건 우리 문화가 아니라 끔찍한 혼종이라고!)
게다가 저 동상은 우리 지역의 작가가 만든 작품이잖아.
그는 인디언 문화를 지키고 싶어하던 활동가이기도 했고.
(의도가 어쨌건간에 그는 우리의 모습을 대상화하는 백인중한사람일뿐이야)
게다가 저 작품은 자랑스러운 세계적 미술관의 상징이 되었어.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저 작품을 사랑하잖아. MFA의 대표 작품이 인디언 동상이 된 것이 자랑스럽지 않아?
왜 그걸 헐뜯는거야. 넌 우리 뉴 잉글랜드 지역의 주민이 아니니? 넌 우리와 하나가 아니구나?
(아니 난 온전한 나로서 하나가 되고 싶어, 저 동상처럼 인디언 원주민이라면 이런 모습이라는 선입견 없이, 온전한 나 개인으로! )
아, 정말 피곤하구나. 작품은 작품일 뿐이야. 있는 그대로 즐기면 안돼?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의미가 다 너와 같지는 않잖아. 그걸 박탈할 권리가 너에게 있어?
(......)
아마도, 이런 논쟁이 쌓이고 싸여 결국 MFA는 가장 사랑받는 작품 앞에 그 “complicated history”를 고백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냐 예술이냐는 선택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이런 복잡한 문제를 고백하는 것은 작품을 더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정치적 올바름>을 피곤해 하는 사람들은 사실 아주 많다. 그것은 지난 대선 트럼프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고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고, 잊을 만 하면 일어나는 인종증오범죄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피곤함을 눈에 띄게 드러내는, 소위 "microagression"에 대한 경계심도 더 커졌다. 얼마전 미국의사협회 팟캐스트에서는 미국의사협회지(JAMA)의 백인 남성 에디터가 "인종주의라는 말을 빼고 얘기하자. 우리는 우리가 인종주의자라는 개념에 불쾌감을 느낀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고 사임하기도 했다. 적어도 연수를 와 있는 병원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공지 메일에서는 반인종주의 (antiracism)를 추구해야 한다는 언급이 종종 눈에 띈다. "난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트럼프 식 궤변으로는 충분치 않고, 우리의 말과 행동에 스며든 인종주의적 측면을 인정해야 하며, 반 인종주의자 (antiracist)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흑인 역사학자 이브람 켄디 (베스트 셀러 "how to be an antiracist"의 저자)의 주장이 점점 더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이 피로감은 강자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해서, 더욱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예를 들면 나는 의사이므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와 같은 환자로서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를 읽을 때 솔직히 불편하고 피곤하다. 의료인으로서는 반성하며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지만 사소한 부분 (대체의학 관련부분, 혹은 의료시스템과 관련하여 의료진을 비판하는 부분인 것 같다)을 계속 트집잡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책을 많은 이들이 환자로서의 진정성이 담긴 서사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스테디셀러가 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환자 본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섬세한 감정의 변화와 이를 받아들이고 존재의 의미를 복원해나가는 과정을 그려낸 이 에세이는 분명 예술적 가치가 있다. 반면 내가 느낀 자잘한 뒤틀림은 나름의 정당한 이유는 있겠지만 결국은 강자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거나 평가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한편 나는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약자이기도 하다. 최근 즐겨듣던 독서 팟캐스트의 댓글게시판에 글을 썼는데, 최근 팟캐스트에 등장한 일본의 베스트셀러 소설 <한자와 나오키>라는 작품에 대해서다. 진행자들의 소개에 흥미가 생겨 재밌기 읽긴 했지만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여성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는데, 그게 남성 진행자들의 눈에는 잘 안보이는 모양이다’라고 적었다. 그러자 진행자가 다음 회차에서 이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댓글을 달았는데, 그 역시 정치적 올바름, 여기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피로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기업소설이라는 장르가 원래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정형화된 스타일이고, 그것을 벗어난 가치 또한 인정받아야 할 지점이다. 하여 이 소설이 여성혐오라는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으며,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는 여성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어 여혐작가로 매도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진행자의 반응이 다소 방어적이어서 좀 당황했는데, 강자로서의 피로감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Appeal to the Great Spirit>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을 때, “이 작품은 원주민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고, 이 작품의 작가는 인디언 권익옹호활동을 한 사람인데, 뭐가 문제라서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거냐”는 말을 들었다면 아마 나와 비슷한 심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조셉 조단은 에세이를 이렇게 맺는다. “이제 이 동상과 관련된 논쟁과 관련해 더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의무는 우리 원주민들이 아니라 백인들에게 있다. 토니 모리슨은 1993년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과 싸우고 있느냐는 인터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만약 당신 옆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야 당신의 키가 커 보일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제 생각엔 인종차별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아니라 백인들에게 정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는 그들의 문제에요. 제가 아니라. 저는 좀 빼주세요.’라고.’”
아, 나도 좀 빼줘. 여성의 시각에서 본 작품에 대한 비평에 대해 숙고해봐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남성들이라고. 당신들에겐 피로해 할 권리가 없어. 일단은 좀 닥치고 들으라고.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건지 생각을 좀 해보라고. 그리고 그게 작품에 낙인을 찍거나 폄훼하는 것이라고 웅엥웅거릴 필요는 없어. <Appeal to the Great Spirit>은 아직 저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고, 그에 대한 많은 논쟁거리와 이야기들도 결국 작품의 힘이고 그 작품의 의미가 되는거야.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극찬을 받은 <한자와 나오키>역시 페미니즘 비평의 소재가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딨나? 그러니까 좀 들어. 들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