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의심전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coAzim Apr 09. 2021

3기 암환자

선거는 늘 그렇지만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열기가 고조되면서 막말과 비하 발언들은 빠지지 않았다. 직업이 의사다 보니 역시 환자와 관련된 비하발언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출마한 도시를 ‘3기 암환자 신세’에 비유하며 자신은 이를 살리는 '유능한 의사'라는 어떤 후보의 말을 들었을 때, 암을 진료하는 의사에게는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고, 선거가 끝난 지금도 계속 마음 속에 남아있다.

첫 번째 의문. “어떤 암 3기지….?”

물론 그 후보는 ‘요즘은 치료를 잘하면 3기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도시도 암환자처럼 회복시키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런데 암의 병기만큼 중요한 건 암의 종류다. 대장암 3기의 생존률은 80%, 췌장암 3기의 생존률은 20%다. 어떤 종류의 암인지 알려면 조직검사 (암 조직을 떼어서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검사)가 먼저 필요하다. 암인지 아닌지, 암이면 어떤 종류의 암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도시가 과연 어떤 병에 걸렸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신공항이 없는 것이 병이었을까? 여러 번 경제성평가를 하고도 신공항을 그 도시에 건설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을, 선거 결과에 몸이 단 국회의원들이 여야가 일치단결하여 뒤엎을 정도로 진단이 확실했는지 잘 모르겠다. 재조직검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새로 시장이 되신 분의 진단도 다르지 않은 것 같으니 더욱 걱정이다. 암 같이 치명적일 수 있는 질병은 진단이 불확실할 때 몇 번이고 조직검사를 하는 것이 종종 있는 일이다. 환자들은 진단과정이 길어질수록 답답해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치료가 여기에 달려있기에 여기서 어긋나면 이후의 모든 과정이 어그러지고 결국 손해를 입는 것은 환자라는 것을 의사는 알고 있다. 유능한 의사는 신중한 의사다.

두 번째 의문. “그런데 3기면 나 혼자 살리는 건 아닌데….?”

암마다 다르지만 폐암, 위암 같이 비교적 흔한 암의 3기는 수술 이외의 다른 치료방법이 필요하다. 수술로 눈에 보이는 암은 제거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흩뿌려진 암세포가 재발을 일으킬 위험이 높은 단계가 3기다. 재발을 막기 위해 수술 전후로 항암제가 대개 추가되고, 종종 방사선치료도 해야 한다. 진단을 제대로 해줄 영상의학과, 병리과 의사가 필요하고, 암환자 간호에 능숙한 전문간호팀도 필수적이다. 이런 여러 영역의 치료방법을 동원하여 최적의 결과를 내기 위한 접근방식을 “다학제적 진료”라고 한다. 이럴 때 의사들은 ‘이 환자를 내가 살렸다’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 팀이 살렸다’고 한다. 의사 한 명이 유능해도 그 팀이 변변치 못하면 암 치료는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아마 그가 낙선한 것은 그 자신보다는 그의 팀을 믿지 못한 시민들의 선택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세 번째 의문. “4기 환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종양내과의사들은 대개 3기와 4기 암환자들을 진료한다. 3기는 치료 후유증으로 힘들어하지만, 4기는 암 자체로 힘들어한다. 고통의 차원이 사실 다르다. 사실 요즘 효과적인 면역항암제, 표적항암제의 등장으로 4기 암환자들은 수 년에서 십수 년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4기 암환자가 겪는 신체적 불편, 그리고 심리적인 위축과 슬픔은 어느 누구도 위로하거나 완화해주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고 가치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픔을 말하고 인정받으며 이것도 역시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3기 암환자 신세’라는 말은 ‘그럼 4기는 과연 어떤 신세란 말인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과 삶, 고통과 회복, 절망과 희망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 안에서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설 곳이 없다.  

암은 명의의 손길로  방에 낫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부작용이 있기도 하고,  뿌리뽑지 못한 질병을 안고 살아가기도 하는 삶의 과정이다. 정치 또한 완벽한 이상향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의 최선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일 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암에 걸렸을 때만 찾게 되는 명의보다는  함께 하며 몸을 돌봐주는 동네 주치의가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암과 관련된 비유는 가급적 정치적 언사에서는 빼주셨으면 한다. 암환자들은 늘 자신이 뭘 잘못해서 암에 걸렸는지를 늘 생각하고 자책하는 사람들이라, 사회와 정치가 덧씌우는 부정적인 은유의 대상까지 되어줄 힘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가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