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여기 CT 촬영실이 어디에요?”
또 아가씨. 아이 씨. 병원복도에서 누군가 길을 묻는데 또 아가씨란다. 가운 입었고 목에 청진기도 걸고 있는데. 아가씨가 아니라 의사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런 악의가 없는 누군가에게 정색을 하고 민망하게 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노동자인 나에게는 그렇게 할 에너지가 없다. 대충 방향을 가르쳐주거나 모른다면서 돌아선다.
물론 지금 40대 중반인 나는 아가씨라 불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턴, 레지던트, 펠로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30대 초반에 정규직 전문의가 되어서도 무던히 겪었던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간호사, 의사, 의료기사들이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병원에서 ‘아가씨’라고 불리고 있다. 동년배의 남성들은 보통 ‘선생님’이라고 불리는데 말이다. 코로나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거운 방호복을 걸치고 온몸을 땀에 절여가며 사투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 의료진들 역시 흔히 ‘아가씨’라고 불리는 고충을 호소한다.
이쯤되면 의아하게 여길 이도 있을 것이다. 아가씨가 비하하는 표현도 아닌데 왜 기분 나빠하느냐고. 의사나 간호사인게 뭐 벼슬이나 되냐고. 물론 호칭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 호칭이 언짢은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규정되는 나의 정체성에 있다. 한 사람에게 있는 그 수많은 정체성 중 굳이 젊은 여성인 것에만 집중하니 그런 호칭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20대-30대의 여성 의료인은 누군가의 딸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연인,아내, 친구, 이웃, 또는 누군가의 제자, 선배, 후배, 동료일 것이다. 길거리를 걷다가 누군가 그를 ‘아가씨’라고 부른다면 그게 문제가 될 리는 없다. 그러나 병원에서 일을 할 때는 의료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역할이 우선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명확히 알리기 위해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의 성과 연령만으로 쉽게 ‘아가씨’라는 범주로 호출된다.
‘아가씨’라는 호칭 자체는 비하의 표현은 물론 아니지만, 한국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가부장적 문화는 이 중립적인 호칭의 품격을 바닥까지 낮추었다. 아가씨 물 좀 떠와. 아가씨 커피 좀 타. 아가씨 여기 좀 와봐. 자연스럽게 붙는 명령어와 반말은 ‘아가씨’라고 호칭되는 존재의 지위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에서 누군가에게 편의 또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부수적인 존재로 격하시켰다. 언어의 힘이란 오묘해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런 사회적 맥락을 모두 한번에 은밀히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왠지 기분은 나쁘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불쾌감과 함께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은 죄책감까지 여성이 떠안게 한다.
최근 모 제약회사의 취업면접에 지원한 여성이 당한 성차별적 질문과 이에 대한 사측의 안일한 대처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으니 월급을 적게 받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면접관의 어이없는 질문은 그를 남성들과 동등한 신입사원 후보자가 아니라 ‘아가씨’로 여겼기에 가능하다. 지금도 수많은 직장과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고 얼마 전엔 국회의원에게까지 일어났던 성추행과 성희롱 역시 여성을 동등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면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모르는가. 당신이 아가씨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병원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고, 1ml 만 어긋나도 생명이 위태로운 약물을 정확히 재어 투여하며, 숨이 넘어가는 목구멍에 산소를 공급한다. 사회의 곳곳에서 인재를 키워내고, 연구와 개발을 하고, 회사의 제품을 판매하고, 계약서를 검토하고, 법을 만든다.
“지난번에 주사맞을 때 식은땀이 많이 나서 힘들었는데, 주사실에서 아가씨들이 잘 돌봐주어서 그나마도 좀 나았어요.”
“네 환자분. 아가씨 아니고 간호사겠죠.”
“아 네 간호사...”
이젠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가 되었고 적어도 어리다고 차별받을 나이는 아니다. 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쓰는 단어를 정색을 하고 수정해주는 것은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만, 신경쓰지 않으면 안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더 불편한 소리도 서슴지 않는 것이 내 세대의 의무라는 것을, ‘아가씨’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