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왜 MRI 결과를 설명을 안해주세요?”
“판독결과 나와서 말씀드렸잖아요. 종양 주변의 부종이 조금 더 심해졌다고….”
레지던트 1년차 때 만났던 장기입원한 말기암 환자의 아내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A 교수님은 외래 진료볼 때마다 사진을 다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신다구요. 선생님은 왜 그렇게 안해주세요?”
비록 초짜 의사이지만 상대가 고명하신 교수님이어도 비교당하는 것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다. 게다가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지. 그럼 A교수님께 물어보시던지요. 하지만 들으셨잖아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요. 안타까운 건 이해하지만 나는 당신 남편 외에도 20여명의 다른 입원환자들을 매일같이 돌보고 밤에는 당직까지 서야 해요. 게다가 MRI를 찍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인데 보호자분이 강력히 요구해서 찍었잖아요. 그걸 일일이 영상 한 컷 한 컷 설명하는 수고까지 나에게 요구하시는 건가요. 게다가 환자가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데 영상을 보는게 뭐가 중요한가요. 왜 호스피스에 가지 않고 여기서 의미없는 MRI를 반복해서 찍고 계신 거에요.
이런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이전 주치의에게 주의하라고 인계받은 ‘짱똘’ 보호자. 그러려니 하자. 당직실에서 동기들과 욕을 섞어 한바탕 ‘벤틸레이션’을 하고 나면 좀 풀리겠지.
그 이후 거의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진료를 하며 이런 저런 환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아무래도 “짱똘”이라 이름 붙인 이들은 기억 속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의사에게 기대하는 이야기는 서로를 신뢰하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피어난 감동 스토리이지만, 나에게 그런 게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막상 떠올리려 하면 기억이 안난다.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는데도 이상하게 먼저 떠오르는 얼굴들은 이런 분들의 성난 표정들이다.
“짱똘”은 소위 ‘진상환자’를 의미하는 병원 속어다. 요즘은 오히려 ‘진상’이라는, 병원 바깥에서도 통하는 단어를 의료진들끼리도 더 많이 쓴다. 내가 수련을 했던 2000년대에는 ‘진상’이라는 단어가 없었는데, 이 단어의 등장에는 “손님이 왕”인 시대를 거치면서 서비스직이 겪어야 했던 감정노동에 대해 이제는 사회가 인식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진상’과 달리 “짱똘”은 쉽게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다. 이는 병원 안에서만 은밀히 소통되는 단어다. 일단 어감부터 두 어절의 된소리로 이루어져 발음에 에너지가 좀더 들어가고, 정말 뭔가 단단한 돌이 내게로 갑자기 날벼락처럼 날아들 것만 같다. 충분히 바쁘고 힘든 일상 속에 갑자기 날아오는 ‘컴플레인’은 사실 정확히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아픈 사람의 말과 행동은 웬만하면 이해받아야 하지 않는가. 환자가 화를 내거나 공격적이거나 소리를 지른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의료인들이 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하나의 범주로 만들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상당히 당혹스럽고 모욕적인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짱똘’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상’이라는 단어에 슬며시 묻어가면서 없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끔은 ‘진상’이 ‘짱똘’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병원에서 사람을 상대하면서 얻는 피로와 상처를 묘사하기에 적절한 말일까. 그것을 마트나 커피숍,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겪는 고충과 슬며시 비슷한 위치에 놓아둘 때 마음은 사실 편하다. 적어도 이해는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의료인들이 겪는 문제는 약간 다르다. 그 ‘진상’들을 ‘갑’이라 부르기는 어렵다는 것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놓인 상황과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차마 아픈 사람들에게 ‘을질’을 당한다고 호소하기는 어렵다. 어디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마음의 응어리는 “짱”과 “똘”을 발음할 때 내뱉으며 조금이나마 몰래 표현할 수 있었다.
“짱똘”은 사실 그냥 단순한 진상고객인 것은 아니다. 병원을 오래 다닐 수록, 몸이 더 아프고 힘들수록, 짱똘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병원에 대한, 의료진에 대한,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몸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심한 언어 또는 신체폭력을 가하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대개 그들은 비의료인의 눈으로 본다면 ‘오죽하면’이라는 말로 용서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드라마에서 ‘아내분의 진단명은 암입니다’라는 선고를 듣고 의사의 멱살을 잡는 남편은 극한의 슬픔과 아내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는다. 특히 암 진단을 전달하는 의사의 말투가 무심하고 건조하다면 남편의 행동은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해준다. 게다가 깔끔한 외관과 최신식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병원 안의 시스템은 오래 다닐 수록 환자 앞에 허점과 부조리를 드러내게 되고, 무엇보다 충분치 못한 인력으로 누구보다 간절한 환자와 가족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해서, 의료진의 무심하거나 성의없는 태도를 참다가 폭발해서, 혈관주사를 의료진이 실패하여 팔이 벌집이 되어서, 환자 상태가 갑자기 손쓸 새 없이 나빠져서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 끝에 병동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내게 영상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며 항의를 하던 보호자 역시 매달 바뀌는 어설픈 레지던트의 진료방식에 매번 적응하는 것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왜 항암치료를 더 하지 않는 것인지, 환자가 사경을 헤메는데 왜 퇴원을 하라고 하는 것인지, 왜 머릿속에 퍼진 암을 계속 MRI를 찍어서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환자라는 약자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드러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 상처가 저절로 낫거나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에, 그것은 “짱”과 “똘” 을 발음하는 입술에 걸친 단단한 덩어리로 고여있게 된다. 갱의실에서, 당직실에서 우리는 약자에게 당하는 고통도 고통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을 매일 마주하고, 그들을 “짱똘”로 부르면서 하루의 피로를 털어낸다. 동료들에게 ‘짱똘’에게 어떻게 당했는지에 대해 넋두리를 하고, 공감해주는 동료들의 위로를 받으며, 근무가 끝나면 술을 마시면서 흘려버리기도 했다. 한참 소셜미디어에 맛을 들였을 때는 지인들만 보는 비공개 계정에 분노와 절망에 찬 말들을 뱉어낸 적도 있었다. 벤틸레이션(ventilation). 공기의 순환을 뜻하는 이 단어는 폐를 비롯한 호흡기계의 작용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단어이지만, 병원에서는 ‘짱똘’로 인한 상처에서 배어나온 감정의 노폐물을 날숨에 실어 뱉어버리고 다시 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지를 만들기 위한 이런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지치고 망가진 폐에 인공적으로 공기를 불어넣고 빼내는 벤틸레이터(인공호흡기)는 당장 숨을 쉬게 만들어주는 도구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숨이 막히게 된 이유를 찾아 치료해야 벤틸레이터를 뗄 수 있다. 마음의 앙금을 벤틸레이션 시키고 더 이상 환자를 탓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적지 않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의 벤틸레이터를 떼는 데에는 몇 달씩 걸리곤 했다.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지금도 하루만에 훌훌 털기는 어렵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초보의사의 숨을 막히게 했던 보호자의 항의 뒤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기까지가 오래 걸렸다. 그걸 인정하면 그녀는 이해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고 나는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서야 감정을 덜어내고 헤아려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말기암 판정을 받고 의료진의 관심이 모두 사라진 듯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잦은 검사를 요구하며 어떻게든 병원에 있을 이유를 만들고 불안을 해결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검사를 하고 나면 또다른 불안이 몰려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상급종합병원에서 불필요하게 입원을 연장하면서 의료진의 권유에 반하는 검사를 요구하는 것이 정당화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왜 그러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짱똘이니까,라는 말 한마디면 쉽게 외면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마법의 단어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단어로 환자와 보호자를 규정하고 판단할 때 마음의 벤틸레이터를 떼기는 쉽지 않다.
환자가 자신의 영상검사결과를 직접 보면서 설명을 듣고 싶은 것이 당연한 욕구이자 권리라는 것을 나는 20년전의 그녀에게 처음 배웠다. 비전문가가 영상을 본들 뭘 알겠느냐는 생각을 의사 생활 초반에 고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녀가 뇌리 속에 ‘짱똘 보호자’로 강렬하게 남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기억에 남는 짱똘 환자와 보호자들은 그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를 약간 더 좋은 의사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모니터가 아니라 좀더 환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억지로라도 얼굴을 펴고 미소를 짓기, 환자의 말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끊지 않고 듣기, 이런 의사소통의 꿀팁들을 다 잘 지키지는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쓰게 된 것은 의사의 태도를 지적하는 ‘짱똘'들의 볼멘 소리를 듣고서였을 것이다. 물론 그런 소리를 더 듣기 싫어서 책잡히지 않으려고 태도에 신경쓰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환자들이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것들 때문에 상처받는지를, ‘짱똘’들이 소리높여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정말 잘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같은 존재들인 것은 아닐까. 좀 더 예민하고, 좀더 까칠하고 시끄러운, 피곤한 일을 번번이 만들어 눈을 흘기게 되지만 결국은 많은 이들을 화마에서 구하는 화재경보기 같은 존재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