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요청하는 직장제출용 진단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한 가지는 치료로부터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내용이다. 대개 병가를 연장하기 위한 목적이다. 사실 정확한 시간을 예측하기는 어려우므로 보통 관련 연구결과를 참고하거나 경험을 바탕으로 쓰기는 하지만, 모든 부작용이 사라지고 완벽히 질병 전의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기준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의 부작용은 사라지지만 어떤 부작용은 평생 가는 후유증으로 남기도 하며, 환자가 병을 앓기 전에 하던 일의 강도도 천차만별이라 본인의 주관적인 느낌도 중요하다. 결국은 6개월, 1년 등 환자가 필요한 만큼의 기간을 기재하게 된다.
그런데 대개 이런 진단서를 받아가는 이들은 대기업 사원, 공무원, 교사, 기타 전문직 등 선망의 대상이 되는 정규직에 종사하는 환자들이다. 반면 ‘업무에 지장이 없다’는 진단서를 받아가려는 사람들이 다른 한 편에 있다. 이들은 치료를 받으면서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중소기업에 근무하거나 계약직, 일용직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다. 사실 항암치료는 약제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직장일을 병행하면서 견뎌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쉴 수가 없다.
“부작용은 잘 견디고 계시긴 하지만… 아무래도 힘드실텐데요….”
“저 괜찮아요. 주사 맞아도 잘 견디고 있어요. 선생님, 저 여기서 잘리면 답이 없어요. 부탁 좀 드릴께요, 네?”
똑같은 치료를 받고 있고 부작용의 정도도 비슷한 두 사람에게, 한 사람은 회복에 6개월이 걸리므로 그때까지 ‘안정가료를 요한다’고 쓰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전신상태 양호하여 업무에 지장이 크지 않다’고 쓰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모순적이다. 물론 항암치료의 부작용은 1단계부터 4단계까지 중증도를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다. 2-3단계를 넘어가는 심한 부작용을 겪는 분에게 직장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서를 써드릴 수는 없다. 그러나 1단계 정도의 부작용은 견디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다소 걱정은 되지만 환자가 원하면 ‘업무가 가능하다’고 쓰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더 쉬어야 한다’고 쓴 진단서는 거짓일까. 항암치료 중인 환자에게 ‘당신은 경미한 부작용만 있으니 어서 가서 일을 해야 한다’고 내몰 수는 없는 일이다. 장기적인 부작용은 또 다른 문제다. 지금 괜찮아도 몇 달, 몇 년 후까지 피로나 손발저림이 지속되어 일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결국은 환자의 사정에 따라 ‘맞춤형 진단서’가 나가게 된다.
유명인의 인터뷰에서 흔히 등장하는 “너무 과로한 나머지 몸이 상했고, 의사가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강력히 권고했다”는 내용을 보면 종종 의문이 생긴다. 위중한 상태가 아닌 한 그런 권고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탄탄한 환자에게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일을 쉬었을 때 빈곤의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환자라면 ‘반드시 쉬어야 한다’며 출근을 말릴 수가 있을까? 만약 누구나 아팠을 때 일을 쉴 권리가 있다면 나는 ‘항암치료 중에는 가능하면 일을 쉬고 그 이후에는 몸 상태를 보아가며 결정하자’는 모범답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불평등의 맨 얼굴 앞에서 의학은 무력하다. 치료 중에도 일을 해야 하는 담장 바깥의 사람들과, 치료가 끝난 후에도 원하는 만큼 병가를 쓸 수 있는 담장 안쪽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아야 하는 모순 앞에 자괴감을 느낀다.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유급 병가를 규정하고 있는 기업은 전체의 7.3%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급질병휴직을 보장하는 비율은 더 적어서 6.1%다. 상당수의 기업은 무급 질병휴직은 허용하지만 3개월 이내에 복귀하지 않을 시 해고사유가 된다고 한다. 수술 후 회복에 최소 1개월,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에 3-6개월이 소요되는 일반적인 암 치료의 경우 실직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인 셈이다. 치료 후 복직이 가능한 경우에도 직장 내 적응에 어려움을 겪거나 인사상 불이익, 차별과 배제에 신음하는 이들이 많지만, 복직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은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 터이다.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질병 및 자가격리로 인해 직장을 쉬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반면 아파서 쉴 권리가 없는 이들의 고통 또한 더욱 심해지고 있음이 동시에 드러났다. 이번 기회에 감염병은 물론 암과 같은 만성질환으로 인한 병가와 휴직을 좀더 보편적인 권리로 자리매김하는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