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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대화를 효율적으로 할 방법은 없다

<치료하는 마음> 원더박스, 2022

by OncoAzim

"나 왜 또 여기로 보냈어요. 나 연명의료니 뭐니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고 난 서명하기 싫어요."

두번째로 완화의료담당 간호사에게 보냈던 환자의 차트에 이렇게 적혀있다. 간호사가 환자의 말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쓸 항암제가 떨어져가고 앞으로 6개월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을텐데. 한숨이 나온다. 차트에 이렇게 적어놓는다.

"POLST 서명 거부하신 분으로 임종 임박시에는 가족들에게 연명의료관련 서명 구득 필요"


POLST 는 "Physician orders for life-sustaining treatment"의 약자로 우리나라의 연명의료결정법에 의하면 <연명의료계획서>가 정식명칭이다. 말기 환자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자신이 임종에 임박하여 받게 될 의료적 처치에 대해 미리 결정해놓는 서류를 의미한다. (자세한 설명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홈페이지참조 - https://www.lst.go.kr/plan/medicalplan.do)

예전엔 이러한 의료적 처치를 모두 보호자가 결정했다. 나빠지면 중환자실에 갈지, 심폐소생술을 할 지 환자와 미리 상의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면서 이제는 환자와 직접 상의하여 결정하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사실 환자 본인이 미리 결정하지 않으면 임종이 임박한 상태에서 연명의료와 관련한 결정을 하려면 가족관계 증명서를 확인하고 서류에 있는 가족 전원의 확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번거로운 절차가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가급적 환자가 건강할 때 연명의료에 대한 의사를 확인하고 문서로 남겨놓는 것이 중요해졌고, 특히 진행암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점점 쓸 수 있는 약이 떨어져 가면 담당의사는 마음이 다급해진다. 이 환자가 더 나빠져서 응급실을 들락거리기 전에 상황을 설명하고 악화되었을 때 어찌 할지 결정을 해놓아야 할텐데, 불필요한 중환자실치료로 고통받지 않으려면 POLST에 서명해놓으셔야 할텐데, 도저히 이런 얘기를 차분하게 할 시간이 없다.


sandtimer.jpg 죽음과 이를 위한 준비에 대한 이야기. 도저히 제한된 시간 내에 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병원에서는 '효율적인' 프로세스를 개발했다. 의사가 우선 대략적인 병 상태를 설명한 뒤 "앞으로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으니 향후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가라"고 완화의료담당 간호사를 만나도록 안내한다. POLST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간호사가 하지만, 아무래도 환자가 궁금한 본인의 병 상태에 대한 설명보다는 일반적인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자신의 예후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환자들에게는 이런 안내가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POLST에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서명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이런 대화는 당혹스러울 가능성이 크다. 간호사를 만나고 역정을 내셨던 위의 환자분같이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면 보다 많은 환자들이 연명의료결정을 미리 하고 임종에 임박한 혼란과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료결정에 관한 책 <치료하는 마음>을 읽고 낭패감을 느꼈다. 책에는 연명의료결정의 순간에 직면하고는 혼란스러워 하는 환자와 가족들, 특히 미리 POLST 또는 사전의료지시서 (Living will: 사전의료의향서라고도 부른다. POLST와는 달리 건강할 때에도 의사의 도움 없이 작성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연명의료관련 결정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에 서명을 했는데도 이후에 결정 자체를 바꾸거나 우왕좌왕하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한 환자 중 약 절반이 결정을 뒤집었다는 연구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 그게 거의 30년전에 발표된 연구라는 점은 더욱 당혹스럽다. "사전의료지시서를 번복하는 환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할지, 건강한 상태에서 아픈 상태나 더 아픈상태가 되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상상하지 못하기도 (236 p)" 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힘든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서명해놓고서도, 막상 죽음에 임박하면 차마 가족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연명의료를 선택하고, 그러고는 또 곧 후회하는 그런 스토리는 낯설지 않다. 결국 "환자, 가족, 의사 간의 진지하고, 감정적으로 부담스럽고, 시간이 많이 드는 대화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272p)"고 하니 외래진료실에서 짧은 진료시간에 연명의료결정을 유도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한계가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치료하는마음.jpg

"위독한환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더 많이 보이고 시간을 더 할애해야 한다는 필요는, 효율에 대한 보상을 점점 늘려 가는 현대 의료체계와 충돌한다. 저명한 보건 정책 입안자들과 일부 의사들은 병원을 하나의 공장으로 상정하고 산업화된 방식으로 진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환자 방문을 몇 분으로 제한하고, 표준 치료 계획과 질적 척도에 맞게 대화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중략) 환자가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환자와 가족을 인도하기란 쉽지 않으며, 거기에 효율적인 과정이란 있을 수 없다 (248p)"

이런 일을 대형병원의 공장같은 방식에 맞추어 뭔가 효율적으로 해보려고 했던 시도에는 아마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이런 시도라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POLST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환자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인지 그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는 아마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얻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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