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abella Steinbacher performs Lentz
클래식 공연을 잘 보진 않고, 가끔 봐도 공연관람후기는 여간해선 잘 쓰지 않는다. 일단 시간이 없고, 클래식을 너무 몰라서. 세상에 클덕들이 오죽 많은가? 그 사이에서 어설프게 한마디라도 했다간 왠지 사정없이 까여 만신창이가 될 것만 같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보고 글로 써서 남기게 된 이유는...
자그마치 공연장소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스스로의 기억에 남겨놓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시드니에 2018년에 애들 데리고 패키지여행을 갔는데 시드니오페라하우스 투어를 했다. (건물 자체를 보여주고 건축양식과 역사를 설명해주는 한국어 투어가 있다) 그때 생각한 것은 언젠가는 여기서 공연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5년의 시간이 지나 일로 3일간 시드니로 가게 됐다. 그러나 막상 출발 이틀전에야 공연이 뭐 있는지 찾아보았고 일정상 내가 볼 수 있는 공연은 이거 하나뿐. "Arabella Steinbacher performs Lentz"
아라벨라 슈타인바허…. 모름.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데 잘 모르겠다. 바이올린 하면 안네소피무터 정경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인데. 아 카퓌송과 바딤글루즈만 공연도 보긴 했었구나. 아 그러고 보니 힐러리 한도 들어보긴 했는데.
렌츠….아니 소화기암 연구자 중 비슷한 이름은 있는데 이 사람은 누구지. 대부분 클래식공연은 연주자는 몰라도 작곡가는 다 유명한 사람들 곡들 아닌가.
자 공연리플렛을 통해 알아보자. 시드니심포니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렌츠 (1965년생이니 아직 50대)가 슈타인바허를 위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이 이 공연의 메인 곡이다. 즉 현대 클래식 음악 (contemporary classical music)인 것. 이 곡의 “ … to beam in distant heavens…”라는 제목은 작곡가가 감명깊게 읽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서사시 "예루살렘"중의 구절에서 따왔다. 이번 공연이 이 곡의 전 세계 초연 (World Premiere) 이라니 어쩌다 일정맞춰 예약한 것 뿐인데 갑자기 너무 황송해진다.
첨부터 당황스럽다.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협연자인 아라벨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연주를 시작한다. 헉 이거 머지. 그런데 지휘가 시작되자마자 타악기 연주자가 엄청 큰 망치(사람 키보다 더 큰데 무슨 만화에 나오는 것 같은 장도리처럼 생겼다)를 들고 어딘가를 꽝 때림….으헉 이건 또 뭐지… 하는데 아무도 활을 들지 않은 것 같은데도 불안한 음정의 바이올린 소리가 나직히 울려퍼지고 관중은 도대체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해설을 보면 아마 전자키보드로 내는 바이올린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는 와중에 협연자가 등장하며 그 두려움 또는 설렘이 담긴 멜로디를 연주하며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연주는 시종일관 뭐가 튀어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한 형태로 지속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내 느낌에 가장 맞는 것 같다. 타악기 주자들은 망치에 그치지 않고 무슨 큰 철판을 흔들어대거나 시시때때로 (다 악보대로 하는 것일 듯 하지만 마치 즉흥적으로 두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를 두드리고 있고 심지어 관악기 주자들도 악보철을 막대로 치며 소리를 내는 한편, 협연자는 클알못이 듣기에는 과히 아름답지 않은, 비명같기도 한 소리를 만들어내다가 간혹 노래하듯 멜로디를 뽑아내기도 한다. 마치 어둠과 고통 속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온전치 못한 형태의 희망과도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뭐냐! 하고 공연을 들으며 리플렛의 작품 해설을 삼중고 (어둠+ 노안+ 영어)를 뚫고 읽어보았다. 렌츠는 스타인바허가 자신에게 작곡을 부탁했을때 ‘이미 많은 아름다운 클래식 곡들이 있는데 내가 보탤 것이 있을까’하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처음엔 아라벨라 슈타인바허가 천사처럼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곧 인간의 양면성 ( 천사이면서도 악마인)에 생각이 닿고, 그러다가 어느날 밤 아웃백 (여느 한국인처럼 나도 스테이크하우스를 연상하였으나 ㅠㅠ 찾아보니 호주의 내륙 황무지를 그렇게 부른다고)에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고 홀로 앉아있다가 느낀 외로움과 존재의 취약함,파괴되어가는 지구를 생각하며 느끼는 슬픔을 떠올렸다고. 쏟아지는 별빛 아래의 바이올린을 생각하며 전자키보드의 바이올린 소리, 전자기타 등의 가짜 소리 (”fake sound”) 와 대화하는 아라벨라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선율을 상상했다. 거칠고 선명하며 환각적인 이 소리의 조합들을 통해 기후변화와 전쟁으로 얼룩진 종말론적 풍경을 묘사하고 싶었다…는 것이 작곡가의 말이다.
뭔가 이해가 될듯 말듯 하지만 읽고보니 예측불가한 전개에 담긴 슬픔과 불안, 그럼에도 살아있는 작은 희망이 느껴지는 듯 싶기도 했다. 곡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 대왕 장도리를 내려치는 소리로 종료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잘 감이 안온다. 세상의 시작과 끝? 아니면 다시금 바쁘고 생각없이 살아가는 현실로의 복귀? 일단 나에겐 연구자미팅을 빙자하여 허락된 3일의 휴가의 시작과 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꿈 깨. 넌 지금 시드니에 있지만 화욜 외래 진료환자 100명이야..... (다음주는 노동절/어린이날 이틀 연휴라 그야말로 외래 진료가 지옥이다... 게다가 나는 시드니 다녀오느라 밀린 환자들까지...T-T)
이번 공연에서는 렌츠의 곡 이외에도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바로크시대 음악가인 비버의 소나타 “Battalia”도 연주했는데 하프시코드를 첨 봐서 (근데 1990 년 제작이라고 ㅎ) 신기했다. 연주자들이 연주 중에 함께 발을 굴러 소리를 내는 것도 재밌었다. 아마도 곡이 묘사하는 전쟁의 격렬함 또는 군대의 행진을 표현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좀 귀여웠다.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연주되었는데, 알고보니 많이 들어본 멜로디로 시작한다. 스탠리큐브릭의 <스페이스오딧세이>에 삽입되어 유명해진 곡이라고…(그것이 영화음악이 아니었구나 라고 깨닫는 클알못)
아무튼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 기억으로 몇 달은 견디고 살아갈 수 있을만큼. 남은 생 동안 시드니에 다시 갈 수 있을까? 기억과 느낌을 글로 박제해놓으니 다시 가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여유로운 마음이 들어 좋다. 그게 글을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