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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Mar 19. 2023

69시간 대 88시간

소위 “주 69시간 근무제”로 대표되는 정부의 새 노동정책은 양대 노총은 물론 MZ세대로부터도 외면받았지만, 유일하게 이 정책을 반긴 근로자들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주 근로시간의 상한선이 88시간인 전공의들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최근 “88시간을 69시간제로 변경하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고 밝혔는데, 실제 일반근로자들의 법정근로시간 한도인 52시간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처럼, 전공의특별법에 근거한 88시간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올해 초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 약 50%의 전공의들은 여전히 법정근로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했다고 보고했다. 

내가 수련을 했었던 2000년대는 그나마도 법도 없던 시대라 주 100시간이 넘는 과로를 견뎌야 했었지만, 지금 전공의들의 삶이 특별히 더 나은 것 같지도 않다. 법정근로시간을 지키느라 당직 횟수가 줄어든 대신 한번 당직을 설 때 더 많은 환자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내과 병동에서는 예전엔 하룻밤 콜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80명 정도였다면 이젠 100-200명에 육박한다. 젊음을 갈아넣어 유지되는 종합병원의 밤은 매일매일이 백척간두에 선 상황이나 다름없다. 

전공의들 뿐만 아니라 일반 근로자들의 노동시간도 외국에 비해 훨씬 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OECD 국가들의 연간 노동시간의 평균은 1716시간으로 우리나라의 1915시간보다 약 200시간이 적다. 우리는 왜 선진국에 비해 더 오래 일해야 할까? 경제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제조업 중심의 국가라 미국이나 유럽 등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유행이 한참 심할 당시 우리 경제를 버티게 해 준 것은 마스크, 손세정제, 보호장구 등을 제 때 만들 수 있었던 제조업이었다는 뉴스를 기억한다. 또한 제조업이라고 항상 생산성이 더 떨어지는 것만도 아니다. 제조업비중이 우리나라 다음으로 높은 독일은 연간노동시간이 약 1349시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짧고 우리나라보다 약 560시간이 적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서 나와야 할 정책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이지 ‘노동시간의 탄력적 운용’을 내세워 자칫 사업주 맘대로 노동시간을 연장할 수도 있는 꼼수여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내가 몸담고 있는 의료 역시 서비스업이지만 제조업처럼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이 산업의 생산성은 결국 투입된 의료인력과 비용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국민의 건강 수준일텐데, 그런 면에서는 이미 한계에 봉착한 느낌이다. 특히 전공의들이 주로 종사하고 있는 입원환자 진료는 사실 상당한 비효율로 점철되고 있는 우리 의료의 대표적인 단면이다. 주치의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고혈압과 당뇨는 결국 심근경색, 뇌졸중, 급성신부전 등의 합병증을 일으켜 입원환자를 양산한다. 지역사회에서의 돌봄 제공이 어렵고 왕진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방치된 만성질환 환자들의 종착역은 결국 응급실을 통한 입원이다. 호스피스 돌봄 제공을 제 때 받지 못하고 끝없이 항암치료를 받게 되는 암환자들 역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전전한다. 입원진료는 외래진료나 환자 교육 등의 예방 서비스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 특히 전공의와 간호사들의 야간노동이 투입되어야 하지만, 이로 인한 건강 수준의 향상은 미미하다. 현재 대형종합병원 중심의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는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하며 일견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큰 병원까지 오기 전 단계에서 입원을 하지 않도록 예방해주는 의료서비스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개원가는 미용과 다이어트로 점철된 지 오래이고, 중소규모의 병원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입원환자들은 고령화와 함께 더 늘어날 것이고, 더 많은 전공의들을 더 오래 갈아넣어야 병동이 운영될 것인데, 과연 이게 지속가능할 것인가. 

전공의들이 더 오래 일한다고 해서 환자들이 건강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예방 서비스를 강화하여 입원 의료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우리 의료의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주당 근로시간 제한이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늘어난다고 해서 생산성이 더 올라갈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보다는 낮은 노동생산성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근거한 정책이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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