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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Apr 02. 2023

토론

주말에 최재천교수님의 유튜브채널 아마존의 클립들을 연속으로 들었다. 좀 옛날에 나와서 이미 조회수도 꽤 높은 유명 클립들이다.  최재천교수님이 처음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던 시절에 예과생이었던 나는 전공필수였던 일반생물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 거의 강의실에 안 들어가던 시절이라 기억이 잘 안난다 T-T 교수님은 (지지리도 불성실한 의예과 학생 대상 일반생물학 강의를 맡아 괴로워하며) 공부 안 하는 예과생들을 꾸짖으셨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직접 들은건지 다른 친구가 전해준 걸 들은 것인지 가물가물하다. 아마 본인도 의대에 가고 싶었는데 못갔다, 그렇게 남들이 선망하는 과에 들어왔으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 왜들 이모양이냐는 한탄어린 말씀이었던 것 같다. 하버드 학생들과 서울대 학생들을 비교하는 클립을 들으면서는 아 나를 포함한 예과생들은 저기 포함되지는 않았겠구나 싶기도 했다. 토론을 하기는 커녕 수업 자체를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던지라....

한편 교수님은 자녀들이 아름다운 방황을 하도록 놔두라고도 하시는데 그때가 줄기찬 공부와 수련을 앞둔 예과생들에게는 아름다운 방황에 주어진 유일한 시기라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고 변명을 해본다. 한편으론 자유롭게 학문을 탐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였기도 했는데 왜 그땐 그 환경을 잘 이용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되지만 말이다.  

교수님 저도 그땐 아름다운 방황(!)을 하느라 교수님 수업을 안들어갔습니다.... -_-;;

토론이 누가 옳으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으냐를 찾는 것이라는 말씀이 참 와닿았다. 대개 토론이라고 하면 debate,  즉 승패를 가르는 경연으로 생각하는데 실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discussion 이 아닌가. 가장 좋은, 또는 가장 원만한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 그러다가 문득 예전 환자의 말이 떠올랐다.


북한 말씨를 쓰는 한국계 중국인 환자였다. (조선족이라는 말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편견과 혐오로 오염되어버려서 나는 이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국적이 중국이라면 재중동포보다도 한국계 중국인이 좀더 정확한 것 같다.)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치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좀더 관찰을 할 것인가를 놓고 상의를 했다. 암이라는 질병은 치명적이지만 치료 자체도 치명적인 경우가 많아서 결정에 있어 늘 망설이게 된다. 때로는 암인지 아닌지 영상만 가지고는 판정이 어려울 때도 있다. 영상으로 불확실한 병변에 대해 조직검사가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다. 환자들은 대체로 이럴 땐 의사가 정해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의사결정의 근거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 채 의사의 결정만을 따르다가 나중에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의사를 탓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 때 의사는 상당히 방어적으로 나오게 된다.  사실 그러기보다는 제대로 설명해주고 환자가 결정하도록 해야 하건만 시간이 부족하다. 환자 입장에서는 제대로 설명도 못 듣고 결정을 해야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나는 대체로는 환자에게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설명하고 유도하는 쪽이다. 선택의 고통을 환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건 내가 큰 병원에서 근무하기 때문이긴 하다. 환자들이 쉽사리 신뢰하지 않는 작은 병원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환자 본인이 선택하게 해서 최대한 책임을 피하는 방향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분은 지켜보기보다는 치료를 하자고 했던 것 같다.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를 거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한국계 중국인 환자들은 중국의 일반적인 병원들보다 앞선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높고 의사의 말에 잘 따르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분은 치료과 경과관찰의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고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행히 오후진료의 맨 마지막 순서여서 그래도 설명은 꽤 오래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난 후 환자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럼 가족들과 토론해보고 결정을 하겠습니다."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것을 '토론'이라고 표현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북한 말투로 '토론'이라고 하니 순간 80년대의 반공교육의 잔재가 남아있던 내 뇌릿속에는 인민재판의 광경이 스쳤다. 어... 이런 것도 토론의 대상이 되는가. 아니  보통 우리는 '상의'라고 하는데 이걸 '토론'이라고 표현하는가. 이 치료가 더 좋다며 각자 주장하는게 아니라 환자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함께 심사숙고하는 건데 이런 것도 이들은 '토론'이라고 부르는구나.


그러고 보니 '상의'보다는 '토론'이 말하는 주체의 자율성과 존엄성이 더 강조되는 단어같기도 하다. '상의'에서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발화자의 상하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의사와 환자,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그래서 서로 의견이 부딛칠 때도 있지만 질문과 답이 오갈 때가 더 많다. 반면 토론은 발화자가 동등한 주체임이 전제된다. 물론 의료결정에서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 비대칭성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 단어가 대체로 적합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그 환자에게서는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고, 그건 상당부분 '토론'이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다시 진료실에 오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병원에 갔을 가능성이 크다. 대체로 이렇게 많은 설명을 요구하고 다시 진료실에 나타나지 않는 환자를 의사들은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겐 별로 싫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질문을 하는 눈빛은 신중했고 꼿꼿한 자세로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와 잠깐의 '토론'을 했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던 무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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