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정리하다가 어떤 환자분이 주신 쪽지가 나왔다. 진단서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정리해서 주신 것.
사실 이대로만 해주면 너무 고맙다. 일단 두 가지가 명확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정리해주셨다.
1) 어떤 서류가 필요한가?
일단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말씀을 해주셔야 한다. 진단서면 진단서, 소견서면 소견서.
진단명과 진단코드, 진단 일자가 정확히 들어가야 하는 서류면 진단서가 맞다. (대부분 병원에서는 진단서 작성을 할 때 진단명을 선택하면 진단코드가 들어가도록 전산이 설계되어 있다) 소견서는 진단명만 들어가고 코드는 안들어간다. (물론 수기로 쓰면 넣을 순 있지만.... 번거롭다) 대부분 보험금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진단서가 필요하다. 종종 서류에 진단명이 들어가기만 하면 보험회사에서 받아준다고 해서 보다 수수료가 저렴한 통원진료 확인서, 입퇴원확인서에 진단명을 기재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곤란하다. 그런 서류 발급비용이 저렴한 이유는 진단명이 들어가지 않고 단순한 통원치료 여부, 입원 여부에 대한 증명만을 담고 있는 서류이기 때문이다.
2)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가?
가능하면 미리 적어서 정리해오면 좋다. 말로 전달하려면 기억도 잘 안나고 부정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사실 위의 경우는 진단서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 좀 많은 경우다. 진단일자까지야 의사의 판단에 대한 내용이므로 적어주어야겠으나 다르 것들은 어차피 의무기록을 복사해가면 다 나와 있는데 왜 그걸 기록해주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보험회사의 편의 때문에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에 치료기간, 향후 예후에서부터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는지,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지, 재판에 출석할 수 있는지를 기재를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번 서류를 받아가고 나서 나중에야 이런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재발급을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비용이 이중으로 나가게 되므로 처음부터 잘 조사해서 적어오는 것이 좋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환자들은 아래 중 하나다.
1) 어…뭐더라 들어가야 할 내용이 뭐가 있었는데 ….우물우물 (보험회사에 물어보고 다음에 말씀해주세요) 아니 오늘 가져가야 하는데....
2) 항암치료 확인서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그런 서식은 없어요) 아니 그걸 받아오라고 했다니까요 (네 그 내용을 소견서에 적어드리면 되나요 ㅠ) 아니 왜 그게 있다고 했는데....
3) 보험회사 직원이 보내준 문자를 보여준다…. 곧 화면잠금으로 사라진다….환자에게 화면잠금을 풀어달라고 한다….뭐가 필요한지 옮겨적는 동안 또 화면이 잠긴다…
난감한 제증명서류들
과마다 주로 작성하는 서류들이 조금씩 다른데, 종양내과 기준으로 말하자면 의사를 괴롭히는 3대 제증명서류가 있다.
1) 국민연금장애심사용진단서 및 소견서
국민연금공단 가입자는 난치질환 또는 장애를 진단받는 경우 장애연금을 신청하여 받을 수 있다. 종양내과에서 이 서류를 신청하는 경우는 대개 전이 또는 재발암 환자의 경우이므로 아무래도 마음이 좀 아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제까지 투여한 항암치료 시작일과 종료일, 항암치료에 대한 반응, 수술일, 수술목적, 수술명, 방사선치료일, 현재 수행능력상태, 영상검사 소견, 내시경 소견, 등등을 모두 기재해야 해서 이것을 신청하는 환자분이 한명 있으면 하염없이 외래가 지연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모든 것이 환자가 장애연금을 받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정도면 환자의 임상정보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연구에 사용하려고 하는 것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에 이것을 간소화해달라고 국민신문고에 민원도 냈었지만 국민연금공단 측에서는 별다른 설명없이 심사목적으로 다 필요해서 받는 것이라고만 답변을 해서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서류의 번거로움 때문에 발급을 거부하는 의사도 일부이지만 있다. 나는 쓰기는 하는데 진료 지연을 막기 위해 다른 환자 진료가 다 끝난 다음에 쓸 수밖에 없어서, 받으려면 환자가 오래 기다려야 한다. 대부분 다른 의사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므로 이 서류를 받으려면 오전진료라면 점심때까지, 오후진료라면 5-6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2) 노인장기요양소견서
암 진단을 받고 쇠약해지는 이들 중 상당수가 노인이므로 방문요양서비스를 받기 위해 이 소견서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소견서 또한 5-6장에 달하는 복잡한 서류여서 진료 지연을 피할 수 없었다. 요즘 우리 병원의 종양내과에서는 요즘은 이 서류작성을 노년내과에 의뢰하여 해결하고 있다. 이전에는 그래도 의학적 상태를 기술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얼마나 활동이 가능한지를 보는 기능평가가 들어가므로 (의자에서 일어나 걷고 돌아와 앉기, 앉았다 일어서기, 머리뒤로 양손 깍지끼기...) 도저히 3분진료를 기본으로 하는 진료실에서는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래도 노년내과에는 이런 평가를 전문적으로 하는 인력이 있으므로 다행한 일이다. 아무튼 이것도 별도의 평가를 받아야 하므로 금방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요청하시면 좋겠다.
3) 표적항암약물허가치료 확인서
일단 이런 서류는 없다는 것부터 말해야겠다.병원에서는 이런 서류를 발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표적항암제 특약용으로 보험회사에서 만든 양식이다. 종종 이 서류를 가져와서 수기로 기재해달라고 하는 환자들이 있다. 그러나 내용이 복잡하여 시간이 오래 걸릴 뿐더러, 보험회사 양식이므로 병원은 수수료를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으로 서류를 발급했다는 기록이 병원의 전산에 남지도 않는다.
하여 나를 비롯한 많은 의사들은 이 확인서를 작성하지 않고 필요한 내용은 병원 양식인 일반소견서에 작성해드리고 있다. 어떤 보험회사는 자사의 서식에 작성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다고 환자에게 다시 받아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회사가 일부 있어서 나는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낸 적이 있었는데 해당 회사에서도 병원 양식의 소견서를 받는다고 회신을 받았다.
제증명 작성은 귀찮고 번거롭지만 중요한 일
그 외에 내가 모르는 많은 제증명의 세계 - 장애진단서, 병무용 진단서, 후유장해 진단서 등등 - 가 있다. 제증명은 사실 의사가 책임을 지고 작성해야 하는 서류이므로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작성을 해야 맞는 것인데, 환자 볼 시간도 충분치 못하니 제증명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니 종종 레지던트나 전임의 같이 병원 권력구조의 하부에 있는 이들에게 던져지는 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학교나 직장, 경제적 문제, 간혹 재판이나 병역, 징역 등이 좌우되는 중요한 문제여서 이 일의 엄중함은 늘 느끼고 있다. 진단서발급비용은 대체로 1-2만원 정도인데 그게 비싸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걸 작성하는 짧은 시간에도 늘 오류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엉뚱한 진단명을 클릭하거나, 진단일자를 잘못 기재하거나, 그런 등등. 이 일에 정확성을 기하는 데 드는 긴장감과 정신력, 그리고 이에 따른 책임을 고려한다면 큰 비용인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