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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Jun 12. 2017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곳은 어디인가

환자들이 병원에서 임종하는 이유 


이 글은 가디언 지에 호주의 작가이자 의사인 Dr. Ranjani Srivastana가 기고한 칼럼 (원제는 "Dying at home might sound preferable. But I’ve seen the reality")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7/may/01/dying-at-home-terminally-ill-hospital 

이 글을 읽게 된 계기와 저의 생각을 잠깐 적어둡니다. 지난 6월 초 미국 임상암학회에 참석했는데 종양내과의사의 글쓰기에 대한 세션이 있어 들어가보았고, Dr. Srivastana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인도출신에 영국, 미국에서 교육받고 호주에서 일하는 그녀의 다양한 삶의 경험들은 풍부한 이야기의 원천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의 글들은 병원과 환자로부터 나옵니다. 굵직한 의학저널을 비롯해 가디언지의 고정필자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글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첫번째로 읽은 것이 이 칼럼입니다. 평소에 제가 하던 생각과도 많이 일치하여 여러 분들과 같이 읽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환자들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병원에서 더 많이 죽습니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환자의 비율은 세계최고수준입니다. 환자들의 '의료집착적 행태'라고만 말하기엔 호스피스시설도 부족하고 가정간호나 왕진이 안되니 집에서 임종할만한 환경이 안됩니다. 퇴원을 거부하는 말기암환자들의 마음을 사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두렵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환자들을 계속 병원(특히 상급종합병원)에서 돌보는 것이 해결방안은 아닐 것 같습니다. 병원은 급성기환자(폐렴, 심근경색, 뇌졸중, 외상 등)를 위한 한정된 재원입니다. 말기암환자를 호스피스로 보내는 것을 '수익이 안되니 병원에서 내쫓는다'면서 선악의 구도로 몰고가려는 워딩은 옳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완화의료와 예후에 대한 상담을 질병의 경과 중에 일찍 시작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준비가 안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은 사실 병원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할 수 있다면 적어도 호스피스에서 평화롭게 임종할 수 있을 것이고, 가정간호나 왕진이 좀더 활성화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가정에서의 임종 역시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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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환자들 중 단 1 % 만이 병원에서의 임종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⅓ 이상이 병원에서 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말기암환자인데 패혈증으로 응급실에 왔고, 다른 사전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소생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팀 인턴선생님의 보고입니다. 

바싹 여윈 50대 남자 환자는 의료진과 사전지시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는 너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2 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서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던 끝에 입원을 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기구를 이용해서 그를 일으켜세워야 했었죠. 그들의 부엌은 개조된 미니 병원이나 마찬가지였고, 편집자였던 원래 직업을 그만두고 전일 간병인으로서의 역할을 도맡아 해왔던 그의 아내는 당연하게도 많이 지쳐보였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그녀의 헌신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고마워요.” 

“가능한 한 집으로 빨리 가셨으면 좋겠지요?”

“맙소사, 아니에요!”  

그녀의 반응에 우리 모두는 놀랐습니다. 당황한 인턴선생님은 그가 잘못적은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노트를 뒤적입니다. 

“난 그가 부엌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견딜수가 없어요. 내가 거기서 어떻게 식사를 다시 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나는 그가 집에서 임종하기를 원한다고 지레 짐작한 것에 대해 서둘러 그녀에게 사과했습니다. 

“그이는 그렇게 하길 원하죠.” 그녀가 말했습니다. 

“난 그를 집에 데려가지 않을거에요. 하지만 그에게 그걸 말할 순 없어요. 그이는 그렇게 하는 걸 마지막 배신이라고 생각할거에요.” 

딜레마에 부딪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런 상황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그는 집으로 가기엔 너무 아파요…” 그녀가 다시 애원합니다. 

인턴선생님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우리 환자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이론으로 배운 당위를 실제 대화에서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해하고 있겠지요. 

“집으로 모시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고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얘기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봐야겠지요.” 

“그게 우리의 의무에요.” 담당간호사가 죽어가는 남자의 부인에게  말합니다. “이런 힘든 짐을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옆 병실에는 암과 장기부전이 겹친 80대 노인이 있습니다.  나이가 더 많은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집에서 임종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 지 의구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요.  우리 바로 앞에서 그녀는 소리를 질렀고, 그 후 온 몸이 축축해졌습니다. 그녀의 눈은 게슴츠레하게 풀려있고,  아마도 곧 심장마비가 올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께 연락을 할까요?”  담당간호사가 묻습니다. 

“아니요.” 인턴선생님은 그녀의 사그러져가는 맥박을 촉지하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간호사는 남편의 손을 잡고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이를 바라봅니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오래 끌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이 침묵을 가르고 울립니다. 

“무슨일이에요?”

“당신, 심장마비가 왔었어…” 

남편은 눈물을 훔치며 나를 뒤따라 병실을 나옵니다. “선생님, 난 이 상황을 도저히 집에서는 견디지 못했을 거에요. 제발 그녀를 여기 있게 해주세요..”  

세번째 환자는 그녀의 마지막 몇 주 중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기를 간절히 원하는 젊은 엄마입니다. 그녀는 그간 조절되지 않는 말기 증상을  견뎌내야만 했었고,  호스피스로 가라는 우리의 간청을  툭하면 거절해왔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거기 있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매일 밤 극심해지는 통증 때문에 완화의료팀을 불렀고, 결국 그녀의 가정의는 그녀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인력도 서비스도 없는 집에 그녀를 놔두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그녀를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세 명의 암환자는 모두 적극적인 암 치료를 종료한 상태이며, 완화의료서비스의 대상이 되었으며, 집에서 임종하기를 원하였지만 결국 마지막 날을 병원에서 보내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이게 점점 익숙해지는 통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이루어진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1%의 암환자만이 병원에서의 임종을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⅓ 이상이 병원에서 임종합니다. 영국에서는 20%의 환자만이 집에서 임종하며, 나머지는 병원, 호스피스 또는  residential care  를 포함한 기관에서 사망합니다. 영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호주나 미국에서도 20%만이 집에서 임종합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 비율이 약간 높고 (30%),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더 낮습니다 (15%).  

즉, 병원을 비롯한 기관에서의 사망은 매우 흔해졌고, 최근 가디언에서는 “수천명의 암환자들은 집에서 임종하고 싶은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헤드라인으로 이러한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헤드라인은 병원이라는 환경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데, 이는 의사들이 말기 환자에 대해 과도한 치료적 중재를 자제하고 죽음에 대해 좀더 나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상황이 좀더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환자들은 집에서의 임종을 원한다”는 것이 절대선인 양 선언하는 가운데, 우리는 임종기 돌봄의 복잡한 상황을 들여다보지 못할 수 있고, 환자를 돌보는 이들에게 죄책감이라는 부담을 더 많이 지울 수도 있습니다. 


말기환자를 비롯한 누구라도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혼란, 피, 그리고 영상검사 등을 떠올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여분의 의자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며, 혼란만을 던져주는 의사들의 회진행렬을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병원은 환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고 환자들이 병원에서 찾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임상적인 전문성이라는 것입니다. 병원에는 환자를 돌봐줄 수 있는 간호사가 있고, 철두철미한 의사들이 있으며, 지속적인 관찰과 즉각적인 증상완화가 가능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침착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복지사들과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의 상태가 급격히 변할 때, 믿을 만한 누군가가 병상에 나타납니다. 당신이 잠든 배우자를 깨워 화장실에 가야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때 당신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간호사가 당신을 돌보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은 잠들 수 있습니다. 네, 병원은 불완전하지만,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상당한 편안함을 느낍니다.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환자의 신체적 증상을 조절하는 것만큼이나 존재적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병원에서는 그런 영적 돌봄은 잘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보호자들이 환자의 매일매일의 고통을 상대하느라 지친 나머지, 슬픈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사치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신체적 고통을 완화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개입할 때 나머지 정신적, 영적 돌봄이 보다 쉽게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임종 이전에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밟아갈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습니다. 항암치료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그 치료의 이득은 종종 제한적일 뿐이라는 것은 숨가쁜 헤드라인들로 감춰지는 가운데, 환자들이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혹시나” 하는 희망은 좀처럼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항암제를 끊임없이 처방하는 종양내과의사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일이지요. 죽음에 대해 좀처럼 이야기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사회전체적인 경향인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누구든 죽음이 다가올 때 환자와 의사의 의사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한 연구에 의하면 환자들 자신도 그렇게 하기를 꺼립니다. 말기환자들로 하여금 담당 의사에게 예후에 대해 물어보도록 지도를 해주어도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꺼리며, 그들의 백혈구 수치와 다음의 항암치료에 대해 알기를 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택에서 임종하기를 원할 수는 있지만, 예기치 못한 질병의 파문을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집에 머무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이들은 금방 마음을 바꿉니다. 아무도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죠. 결국,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보건의료시스템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이들이 전문적인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문제는 어떤 형태로 그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 입니다.  급성기병원보다는 지역기반의 완화의료서비스를 강화하고 호스피스입원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분명히 더 나은 대안일 것입니다. 급성기병원은 그에 비해 비싸고, 부적절하지만, 집에서 증상조절이 어려운 환자에게는 가장 쉬운 미봉책이기도 합니다. 완화의료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비용효과적이라는 것은 많은 연구에 의해 충분히 밝혀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원되고 있지 못하고, 종종 오해 (역자 주: 죽음을 촉진시키거나 마지막에 버려지는 절차라는 식의,완화의료 서비스 중 일부인 호스피스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를 받기도 하며, 항상 인력과 자원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즉각적으로 진단받고 치료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말기환자의 증상은 빠르게 변하고, 이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1주정도만 연기되어도 이들에게는 수십년 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가끔 환자의 집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많은 임종환자들이 값비싼 장비를 필요로 하고 집안의 가구나 구조를 변경해야 합니다.  비용이 중요하지 않다면, 그들은 예후에 대해 좀더 세밀한 상담을 하여 집안구조를 변경할 지, 아니면 호스피스에 들어갈 지 결정해야 할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들은 이런 어려운 주제를 과감하게 꺼내어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하고, 환자들은  이에  참여할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만약 가정의가 이런 대화를 지속해서 이끌어나가고 병원 바깥에서 현실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집에서 임종하던, 기관에서 임종을 하던 간에, 의료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서비스는 죽어가는 이에게 평화를 주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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