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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Feb 10. 2016

저는 얼마나 살 수 있나요?

진행암을 진단받고 항암화학치료를 받고 있는 한 환자가 저의 진료를 거부하는 일이 최근 일어났습니다. 다른 의사를 보고싶다며 말이죠. 담당하는 전공의는 그 말을 저에게 전하며 얼마나 난감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예상하였던 일이었기 때문에 저는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면 그분에게 미안한 일이겠습니다만 사실 그랬습니다. 모든 환자에게 좋은 의사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의 진료 방식을 싫어하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예감한 이유는 환자에게 최근 기대여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열심히 이 힘든 치료를 받고 견뎌내면 완치가 될 것이라 믿고 있었고, 저는 그 기대를 무참하게 깨었습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최대한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였다고 생각했지만, 그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분명 있기 마련입니다. 기대보다 훨씬 짧은 여명에 실망하고 저에게 투사를 하는 중인 것인지, 아니면 그 말을 전하는 저의 말투와 몸짓과 분위기가 싫었던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후자이기를 바랍니다. 이해를 하시긴 한 것이고 저는 개선될 여지가 있는 것이니까요) 저의 진료를 거부하는 분에게 굳이 다시 가서 피드백을 얻을 엄두는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진행암 환자에게는 기대여명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그 어떤 의사도 환자에게 하기 싫어하는 그 말을 하는 악역을 맡아, 정확한 병식과 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치료에 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종양내과의사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까지 비현실적인 기대에 매달리는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한 불필요한 연명치료에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다 소모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그 막연한 기대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살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환자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그리고 최근 읽은 책에 나온 이 장면을 접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신경외과의사인 폴 칼라니티는 36세의 나이에 전이성 폐암을 진단받고 그의 종양내과의사인 엠마에게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각종 문헌과 데이터를 살펴보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 특별한 환자에게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자"는 답을 하는 엠마를 저는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진단된 암의 알려진 각종 예후인자와 그 자신의 경험을 동원하여 어느 정도의 추정치를 제시하는 것이 제가 늘 해왔던 일이었고, 아마도 폴이 엠마에게 기대하던 바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엠마는 그 대신 선문답같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나는 얼마나 살지 시간에 대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지는 당신 자신이 찾아야해요.” 암 진단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던 폴에게 엠마는 ‘수술을 하는 것이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항암치료를 할 때 신경독성이 있는 cisplatin 대신 carboplatin을 추천한다'고 말하고, 폴은 잠시 당황하여 멍한 상태가 됩니다. 수술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년간의 투병 끝에 작년 3월 생을 마감한 폴의 유고집 “When Breath becomes Air”에서 그는 앞날의 불확실성에 계속해서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속에 그는 자신에게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생각합니다. “암 진단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몰랐다. 암 진단 후에도 불확실한 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생존기간의 과학적 추정치가 아니다. 죽음의 진실은 불확실성에 있다. 결국 남은 삶을 살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결국 수술장으로 돌아가 중단하였던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였고, 학부에서의 영문학 전공 시절 꿈꾸었던 작가로서의 삶 역시 경험하게 됩니다. 인공수정을 통해 딸이 태어나는 기쁨 또한 맛보고 세상을 뜬 그의 삶에 대해 아내인 루시는 말합니다. “그의 암 진단은 비극이었지만, 그의 삶은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나를 거부한 환자를 생각합니다. 문헌상 추정되는 생존기간의 중앙값을 먼저 말씀드렸던것 같습니다. 물론 환자마다 다르다, 더 짧은 분도 있지만 훨씬 더 길게 살기도 한다고 사족을 다는 것은 빼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수명이 이 정도다, 라며 쐐기를 박는 것이 저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일까 하고 약간은 억울한 마음에 며칠을 골똘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무엇이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눠볼 생각부터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알아야 환자가 해야 할 일의 순서가 정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엠마가 폴에게 생존기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피한 이유는, 그가 적어도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완치나 수십년 이상의 장기생존을 기대하는 환자에게는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기대값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폴이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현실적인 기대값'의 범위는 매우 넓습니다. 1년 미만이 될 수도 있지만, 5년 이상이 되는 경우도 드문 것은 아닙니다. 특히 치료법이 점점 발달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생존기간의 불확실성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대략 말씀드린 추정치가 어이없게 빗나가버리는 일을 우리는 흔하게 겪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아니 절대 정확할 수가 없는 수개월 또는 수 년이라는 특정한 숫자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환자의 삶에서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나누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박리다매식 의료현실에서는 녹록하지 않기에, 저는 진행암 및 말기암 환자들을 대할 때 일종의 프로토콜같은 순서를 정해놓고 이를 넘기는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기대여명을 구체적인 숫자로  먼저 제시하고, 병에 대한 인식을 주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접고 준비하게 만든 후, DNR을 받는 것, 이런 식으로 마치 게임에서 미션을 클리어하듯 달려왔지요. 그래요. 끝까지 제대로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다가 환자가 준비할 기회를 잃도록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러나 모든 죽음은, 모든 삶이 그러하듯  개인적이고 특별하기에, 가이드라인이나 프로토콜에 따라 접근할 수만은 없다는 점만은 항상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글은 폴 칼라니티의 저작 "When Breath becomes Air"와 추모 웹페이지 ( http://paulkalanithi.com/ )에 링크된 그의 뉴욕타임즈, 뉴요커 칼럼, 그리고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의 통신원이자 심장내과의사인 리사 로젠바움이 그를 추모하며 기고한 칼럼 (http://www.nejm.org/doi/full/10.1056/NEJMms1516444)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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