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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기

시작 같은 정리기

by 돈냥이



아침 공기가 좀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늦여름과 가을 냄새가 동시에 납니다. 그리고 여름내 우리에게 먹거리를 제공해주었던 작물들을 일제히 철거합니다. 작물이 충분히 자라면 잡초제거는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거대한 덩굴과 작은 나무로 자란 작물 외에 길쭉한 잡초들도 뽑아주어야 합니다.


마치 봄에 처음 밭을 시작할 때처럼 모든 풀을 제거하고 두둑을 쌓습니다.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기 전, 봄과 여름을 지나며 영양이 다 빠졌을 흙에 퇴비도 섞어 줍니다. 거대한 식물 덩어리를 제거하고 나면 밭이 아주 깨끗해 보입니다. 고구마 외에는 모두 정리하고 배추와 무를 심어줍니다.


배추가 자리를 잡는 첫 2주 동안 흙이 마르지 않게 물을 듬뿍 줍니다. 그리고 고구마 줄기를 수확하는 것 외에 할 일은 없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면 잡초도 많이 자라지 않습니다. 새벽에 이슬이 내리기 때문에 더 이상 물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작은 모종이 차가운 이슬을 마시고 거대한 배추로 자라난다




일도 많고 수확도 많던 바쁜 여름이 정신없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해집니다. 하는 일이 적어진 듯하고 밭이 깔끔해집니다. 하지만 수확이 적은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고구마 줄기와 순을 수확할 수 있고 가지와 깻잎을 남겨놓았다면 계속 열매와 잎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줄기를 쳐주어 영양분이 뿌리로 가도록 해야 하는데, 무청으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습니다.


발육이 느린 배추는 더 이상 키우지 않고 중간중간 뽑아서 쌈을 싸 먹기도 하고 겉절이를 해서 수육과 함께 먹기도 합니다. 새벽에 자연스럽게 내려주는 이슬 덕분에 물 주기도 더 이상 하지 않고 오로지 수확만 하는 시기입니다.




아무리 수확해도 무한정 자라나는 기특한 고구마줄기와 고구마순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일들이 이제 적응되고 어느 정도 시스템이 잡히면서 줄어드는 듯한 시기가 옵니다.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헤맬 필요가 없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다 보면 곳간이 늘어나는 시기입니다. 더 풍족한 겨울을 위해 새로운 시도와 배움을 도전해 볼 여유가 생기는 때이기도 합니다. 마치 겨우내 먹을 김장을 위해 새로이 무와 배추를 심듯이요.


시간과 체력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마음도 한결 가볍습니다. 이런 때에는 무엇을 해도 다 잘 됩니다. 여름의 시기에는 열심히 한만큼 결과가 나온다면 가을에는 노력에 비해 많은 것을 얻는 시기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듯이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며, 여름에 땀을 흘리며 보낸 시간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땅속 깊이 고구마가 두툼하게 자라고 있듯 어디선가 당신에게 찾아올 행운이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의 여유를 즐기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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