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못 버리는 엄마와 잘 버리는 딸이 함께 사는 법

by 돈냥이


맥시멀을 추구하지만 잘 버리게 된 이유



온갖 소품과 인형으로 가득한 팬시점은 나의 이상적인 공간의 전형이었다. 인형으로 꽉 찬 벽과 형형색색의 문구가 가득한 테이블은 내가 원하는 복잡하면서도 규칙이 느껴지는 방의 모습이었다. 좋아하는 소품과 인형, 내 취향의 가구로 벽과 수납장을 꽉 채우고 은은한 부분 조명이 비치는 원룸에서의 생활이 어린 나이에 꿈꾸었던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그 꿈은 현실에서 원룸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직장인이 되면서 시작과 함께 깨져버렸다.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가구를 채워 넣으면 방이 그만큼 좁아지고 이사 비용이 늘어났다. 인형과 소품을 눈에 띄게 전시해놓으면 먼지가 앉고 청소를 할 때 손이 많이 가야 했다. 퇴근 후 저녁을 차리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은은한 부분 조명은 내 동선을 따라 또렷하게 비추어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갖추기에 내 월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꽉 찬 정갈함을 추구하는 맥시멀 라이프를 동경하면서 생활은 미니멀할 수밖에 없었다. 저렴하고 단순하서 가벼운 가구와 꼭 필요한 도구 외에 단지 예쁘기만 한 소품 등은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살림은 점점 늘어났고, 점점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도 신기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들었다.


결국 정리정돈에 대한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의 살림 노하우도 찾아보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것만 들여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에 변화가 생기게 되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꼭 필요하다 생각했지만 막상 써보면 다른 도구로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있었.

내가 물건을 버리는 기준은 지난 1년 동안 사용했느냐였고, 연말이 되면 새해맞이 대청소를 하면서 한꺼번에 정리를 하였다. 때문에 내 공간에는 "안 쓰지만 혹시 몰라 놔두는 물건"이 1년 이상 머무는 일은 잘 없었다. 동시에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먼지가 앉거나 곰팡이가 쓰는 일도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했던 엄마의 쟁임병



그 생활은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오면서 계속 유지하였는데, 쟁임병이 있는 엄마와의 충돌은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항상 집이 좁다며 금방 지저분해 보이니 사용한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두라는 엄마였기에 새해맞이 대청소와 함께하는 버리기 의식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나이가 든 후에 돌아온 집은 혼돈과 혼란의 공간이었다.


언제 들어온 줄도 모르고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를 물건들이 붙박이 장과 창고로 쓰는 방, 먼지가 앉은 수납장 안에 그득했고, 집안 구석에 먼지와 곰팡이도 잔뜩 끼어있었다. 정리를 하고 관리를 해서 그나마 이 정도라는 말에,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이제 집안 관리가 힘든 거구나라고 짐작했었다. 하지만 쓰는 것과 안 쓰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 나에게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가 습기를 머금어 곰팡이까지 핀 물건을 얼마 전에 사용했다며 버리면 안 된다는 엄마를 보고 그것이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30대 초반의 자식 손에서 물건을 빼앗을 정도로 힘이 있었고, 아직도 새벽부터 일어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살림을 열심히 꾸려나가고 계셨다. 단지 그 청소와 관리의 방식이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들어온 모든 물건은 언젠가 쓸지 모르니 버리지 않고 놔두고, 그로 인해 청소하기 힘들어 내려앉은 먼지는 어쩔 수 없으며, 오래된 집이라 곰팡이는 락스를 뿌린 직후에만 안 보일 뿐 계속해서 피어나는지라 그냥 포기했다고 한다. 윗 층에서 물이 새는 것도 아니고 외벽 작업도 주기적으로 하는데 결로가 심해 곰팡이가 그득했지만, 결로 공사는 너무 부담이 되어 할 수 없다고 했다.


돈과 시간이 드는 공사는 둘째치고 차고 넘치는 물건만 비워도 공간이 확보되고 먼지가 줄어들고 환기도 제대로 될 텐데 그것조차 양보할 생각이 없으셨다. 치매가 와서 물건에 집착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엄마의 쟁임병은 심각했다. 일 년 간 버리고 다시 사 오기를 하면서 충돌을 반복하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내 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엄마 집이니까.... 게다가 어릴 때나 져주었지 다 큰 자식에게 부모는 그냥 져주지 않았다.





쟁임병 료를 위한 장기전에 돌입하다



백기는 들었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알레르기 비염으로 수시로 이비인후과를 다녀야 하는 모녀가 먼지더미와 곰팡이 그득한 집에서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털 뿜어대는 고양이까지 데리고 들어왔지 않는가! (사실 내 고양이에게 먼지와 곰팡이 핀 공기를 마시게 할 수 없다는 의지가 제일 컸다.)





게임과 컴퓨터 조립을 즐기는 동생 방에는 패키지 박스와 중고 부품들이 그득했다. 동생의 침대는 수납형으로 한쪽에 서랍이 달려있었는데 구조를 보니 다른 한쪽은 비어있는 듯했고, 매트리스를 치워보니 정말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자주 쓰지 않는 박스와 부품들을 침대 밑에 넣으면 그 자리에 새로운 걸 더 사서 넣을 수 있다는 말로 동생을 설득할 수 있었고, 자신의 물건이 아니라서 그런지 엄마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상당히 큰 부피의 짐이 눈앞에서 사라졌고, 그 위에 쌓인 먼지는 엄마와 동생이 보는데서 제거되었다. 책장 위를 가득 매웠던 상자가 사라지니 방이 더 밝아졌고, 가구가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이 더 넓어 보였다. 엄마도 상당히 만족한 듯했지만 버린 것은 없기에, 여전히 비우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그렇게 다시 일 년을 기다렸다.





다음 연말이 되었다. 침대 밑을 열고 동생에게 일 년 동안 꺼내지 않은 물건은 버리고 그 자리에 치울 물건을 넣어라라고 했다. 고민하던 동생은 사용하지는 않지만 기념으로 오래 갖고 있을 패키지 박스와 여러 개 있는 부품들 중 하나씩만 남기 모조리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일 년 간 안 쓸 것 같은 물건들을 그 자리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창고로 사용하던 방으로 가, 내 기억에 지난 일 년 간 쓰지 않았던 물건들을 눈에 잘 띄지 않는 붙박이 장 안쪽으로 넣고 자주 사용하는 물건을 밖으로 내었다. 사용하기 편한 동선이 확보되니 엄마도 적극적으로 도우며 이렇게 정리하니 버리지 않아도 되고 참 좋지 않냐고 하셨다. 가끔은 혹시 이런 물건 없냐며 찾는 나에게 안 쪽 깊숙이 들어가 버린 잡동사니 더미에서 꼭 맞는 물건을 찾아주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오게 되는 물건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과 아닌 것의 위치를 바꾸며 정리를 반복하는 사이 또 다른 연말이 되었다.


붙박이 장 제일 안쪽에 자리 잡은 물건들을 꺼내 지난 일 년 간 사용하지 않았으니 버리겠다고 하자, 여전히 엄마는 얼마 전에 사용했다며 반대하였다. 물건이 왜 이 위치에 있게 되었는지, 안 쪽에 있어서 우리 도움이 없으면 꺼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자주 사용했냐는 말에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고 결국 탐탁지 않아하며 버리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렇게 매 연말이 되면 일 년 동안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버렸다. DIY로 재료만 사서 직접 결로 작업을 하 곰팡이를 잡았고, 가구를 옮기거나 버려 먼지가 쌓일 구석을 줄여나갔다. 필요없다 생각했지만,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아 쓰이지 않다가 쓰임을 찾게 된 물건들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집이 넓어지고 밝아지면서 먼지와 곰팡이가 줄어드니, 이제 더 이상 버리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하시진 않는다. 버릴 물건이 적어지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말 일 년 넘게 안 쓰는 물건이라는 게 있었고, 그것을 버린다고 해도 아쉬울 상황은 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해서 놔두었던 물건을 일 년 내에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버린 뒤에 필요해진 일은 극히 드물었으며, 설사 그런 일이 생겨도 새로 사는 편이 더 좋고 편리했다.





어제 저녁을 먹고 다이소로 산책을 나갔다. 기존에 사용하던 헤어롤이 닳아져서 잘 안된다며 새 것을 사는 엄마에게 전에 쓰던 것은 버리겠다고 하니, 혹시 부족할지 모르니 그래도 그냥 두라고 하신다. 알겠다 하고는 새것을 비치해놓고 오래된 것은 다른 서랍에 넣어두었다. 버리지 않았으니 엄마가 필요해서 찾으면 드리면 되고, 일 년 동안 찾지 않으면 그때 버릴 생각이다. 지난 일 년 동안 이것들 없이도 괜찮지 않았냐면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