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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악동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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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Sep 29. 2024

아 나 머글 아니라고요

사회에 무난하게 통합되기 위해, 다시 말해 ‘도른자’가 되지 않기 위해 꽁꽁 숨겨야 했던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대학교 1학년 때 밤새 술 먹다가도 혼자 몰래 공부해서 4.3 찍은 거. 9년차 회사원인 아직까지도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는 거.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거. 사실 음주가무를 꽤 좋아하고 신나면 릴스 찍는 거. 게임에 한 번 잘못 빠지면 식음 전폐하고 하는 거. 그리고 그 무엇보다, 1년에 책을 100권 가까이 읽는 거.


“조금 고리타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합니다."

올해 초 이직을 하면서 본부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었다. 취미를 물어보길래 독서라고 대답하면서 스스로 ‘고리타분’하다는 전제를 깔아버렸다. 읽는 사람이 흔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모양새였다. 책 읽는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검열하게 만든 몇 가지 사건이 있다. 예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를 보며 어떤 썸남이 나를 ‘고상하다’고 표현하며 학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독서만큼이나 좋아하는 다른 것들이 많은데도 색안경을 끼고 나를 이상하게 보는 그의 반응은 솔직히 좀 불편했다. 다른 경우에도 100권 정도 읽는다고 하면 돌아오는 사람들의 눈빛들이 대체로 곱지만은 않다.. 헉! 하는 소리도 육성으로 들어봤다ㅠ 그 중 나를 리스펙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존재로 보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나는 머글*이 아니며, 머글들 앞에서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도 못하는 그런 이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사실 내게는 1.8K 팔로워의 북스타그램 계정도 하나 있다. 본 계정에 책 리뷰를 올리면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아예 계정을 따로 팠다. 하지만 실제 지인한테 보여지면 신경 쓰일 것 같아서 번호 연동도 하지 않고 철저히 숨겨왔다. 가끔은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소리치던 장면이 생각나곤 했다. 왜 말을 못해! 왜 네 취미가 독서라고 당당하게 말을 못해!!


주변에 읽고 쓰는 사람들이 좀 있기는 하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2번이나 문학 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PD라는 본업까지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나와 똑같이 영문학을 전공한 엄마와는 가끔 고전문학의 특정 인물과 특정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전 업계 사람들과는 점심을 먹다가도 콘텐츠를 주제로 끝장 토론을 했었다. ‘12층에서 가장 잘생긴’ 팀장님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4부작을 모두 읽은 후 추천하고 다녔다. 나도 이미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완독했던 상태였기에 함께 맑은 눈의 광인이 되어 영업에 동참했다.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챗GPT가 아닌 ‘책GPT’처럼 딱 맞는 책 추천이 몇 초 만에 나오곤 한다. 그들과의 카톡방은 매일 신기한 대화로 가득 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런 행사를 하네요. 시대가 묻고 인문이 답하다. 저는 내일 오은 시인 이슬아 작가 강연만 후딱 보고 오려고요 ㅎㅎ”

“저는,,, 딱 저 주말에 이승우 작가(+이동진 평론가) 북토크, 그리고 '더문워커스' 전시가 있어서 다음 기회에 또 비슷한 행사가 있으면 찾아봐야겠어요!”

이쯤 되니 다시 생각해본다. 이 사람들 역시 나만큼이나 좀 수상하다.


올해 독서모임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를 주제 삼아 토론한 적이 있다. 그 이후,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다.

“책 읽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쥐! 그건 진리지~~"

"음.. 책 읽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사람인 게 아니라, 좋은 사람 중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책을 많이 읽으면 자기 주장이 너무 확고해질 수도 있으니.."

"너나 나처럼 읽는 사람들한테나 그 결이 맞는 거지, 보통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작가들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책을 읽는 일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 다른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책 읽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에 대한 답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읽는 마음에 힘을 실어줄 수는 있는 것 같아요."

읽는 사람이 과연 좋은 사람으로 보일지 왜 그렇게 궁금했던 걸까. 그건 분명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실 내게 독서는 거창한 의미를 지닌 무언가는 아니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사람을 좋아해서 읽는다. 길거리에서도 다른 사람을 관찰하며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편인데, 책은 아예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살아보게 해주니까. 그런데 헬스나 캠핑 등 다른 취미와 비교했을 때에도 독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큰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또 책을 읽지 않는 누군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면 우리 팀장님은 내 뒤통수만 보고도 반성하게 된다고..


그런데 재미있게도 최근 ‘텍스트 힙’이란 트렌드 신조어가 생겼다.

“Reading is so sexy.”

<가디언>이 새로운 아이콘인 2001년생 모델 카이아 거버의 북 클럽을 소개하며 뽑은 헤드 카피라고 한다. 카이아 거버가 상징하는 Z세대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한 번도 겪지 않은 디지털 원주민이기에, 이들에게 있어 텍스트는 신선한 문화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독서, 기록 등을 힙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영상과 이미지의 풍요 속에서 고사 직전이던 텍스트에 다시 집중하는 것이 흥미로운 경험이라는 것.** 미우미우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은 북클럽을 테마로 매장을 장식하며 이 트렌드를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독서가 ‘유행’, 혹은 ‘마케팅 아이템’이 되어버린 현상은 양가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문해력 상승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적인 시그널로 볼 수 있겠다. 독서의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세상에.. 도대체 읽는 사람이 얼마나 없길래 ‘힙’해보일 정도인가. 그리고 힙하다는 단어는 결국 독서는 대중적이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가치 판단을 내포한 건 아닌가. 도서전의 입구에서만 100장씩 사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말하자면 누군가는 일생 동안 진심으로 임해온 분야에 스쳐 지나가며 보여주기식으로만 이용하는 모습. 오히려 나는 활자중독인 내 모습을 이렇게 꽁꽁 숨기고 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저 힙해보이려고 책 읽는 거 아니거든요..?


내가 마케팅 조직에 몸 담고 있는 브랜드에서도 최근 텍스트 힙 트렌드를 활용해 다양한 상품을 출시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국내 대문호들이 대거 집필에 참여했기에 기대하며 기다렸다. 이건 마치 아이언맨, 캡틴아메리카, 토르와 헐크가 모인 어벤저스 같은 라인업이잖아! 게다가 우리 브랜드 스토리를 담아 써준다니. 하지만 회사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쟤네가 진짜로 유명한 작가야?"

"이번 달 실적 잘 안 나오지 않을까.. 대중적인 아이템은 아니잖아.”

그리고 실제로도 실적은 이전 달 대비 부진했다. 이와는 반대로 독서모임 단톡방에는 출시 당일 오전 8시반부터 구매 인증샷이 올라왔다. 작가 라인업 무엇,, 산책하러 나온 김에 저도 받았어요~정민님이 쏘아올린 작은 공..! 책 리뷰 계정의 피드에도 수많은 인증샷이 올라왔다. 그들의 반응은 거의 사랑에 빠진 사람에 가까웠다. 분명 독서 양극화 현상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였다. 이쯤 되니 이런 류의 마케팅 활동들이 결국 ‘그들만의 리그’를 더욱 부추기는 건 아닌지 조금 의문이 들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을 펼쳐봤지만 사실 이 주제에 있어 이렇다 할 정답이란 없을 것이다. 읽는 마음 자체가 원래 사람마다 다르고 정답이 없는 거니까. 다만 독서가 특정 층이 과시하는 문화적 특권이 되거나, 지적 허영으로 보여 다른 사람 앞에서 숨기는 누군가의 비밀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약 다음 세대에게 독서가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 또한 기쁠 것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일단은 오늘도 한 발짝 물러나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릴 수 밖에. 포켓몬을 찾는 심정으로 기웃거리다가 가끔 동족을 발견하면 얼싸안는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로 살아가는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러다가 또 세상에 나가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읽는 속도가 엄청 빨라서 그런 거지 책만 읽고 있지는 않아요~”

“끝까지 완독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요~”

“100권 읽는다는 건 임팩트를 주려고 그런 거지 제가 진짜로 그만큼 읽는지는 모를 일이죠 뭐. 하하하.”


하하하. 웃프니까 또 동족을 만나러 다녀와 볼까. 만약 이 글을 읽고 피식했거나 동질감을 느꼈다면, 그건 당신 또한 머글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머글 :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나 마녀가 아닌, 마법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을 이르는 말. 이 글에서는 특정 문화층에 관심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로 사용

**보그 코리아 <책을 읽는 세대가 등장했다>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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