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에겐녀야, 테토녀야?

편리하게 그어진 선 너머를 상상하는 일

by 정민

다음 문장을 읽으며,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혹은 어느 쪽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생각해보자.


A. ‘학창 시절부터 기가 세거나 주장이 강한 편은 아님. 페미닌한 옷(블라우스, 치마, 쉬폰, 트위드, 원피스 등)이 이질감 없이 어울려 자주 입음. 다이어리 꾸미기, 아이돌 덕질, 애니 덕후 등이 많고, 온실 속 화초 느낌도 많음. 삶의 장면들이 다채롭기보다는 안정적이고 규칙적이고 루틴을 벗어나는 편은 아님. 이성에게 먼저 대시를 하기보다 받으면 연애를 하는 편. 이성에게 관심이 딱히 없는 경우에도 가족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럭저럭 소소한 행복 누리며 살아가는 편’


B. ‘학창 시절부터 기가 약한 편은 아니라 친구들을 사귀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은 아님.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고, 자취 어학 연수 유학 여행 등 잘하는 편. 성취 지향적이라면 커리어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을 함. 노는 걸 좋아하는 케이스라면 이왕 놀 거 과감하게 노는 타입. 레이스 주렁주렁한 옷들보다는 단순한게 낫고 힙한 것도 나름 잘 어울린다. 강인한 멘탈, 추진력, 리더십으로 삶의 장면들이 다소 다양하고 풍요로운 편’



2025년 상반기,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유형 테스트에 열광하고 있다. 이번엔 에겐녀, 테토녀다. 각각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estrogen)’과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의 줄임말에서 유래된 이 단어들은, 성별 고유의 기질을 앞세운 성격 유형을 가리킨다.

에겐녀는 여성스러움이 강조된 인물상이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감성적인 면모가 강하다. 박보영, 김태희 같은 스타들이 그 대표 격으로 거론된다. 반면 테토녀는 추진력 있고 당당하며,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여성이다. 화사나 제시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여성들이 이에 해당한다.

SNS 상에서는 자신이 에겐녀인지 테토녀인지 알아보는 테스트가 유행처럼 번졌고, 릴스나 틱톡 영상에서는 두 스타일을 넘나드는 ‘양성적 매력’을 자랑하는 콘텐츠가 넘쳐났다. 일종의 캐릭터 유형 놀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신조어들은 우리가 성별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묘하게 많은 것을 드러낸다.


올해 5월에 에겐녀와 테토녀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 이 단어들 속에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라는 전형적인 성 역할 구분이 짙게 깔려 있다는 점에서였다.

어떤 회사 동료는 나에게 주로 파스텔 톤 계열의 여성스러운 옷을 많이 입고 다니니 에겐녀 같이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같은 날 이 주제로 대화한 친구는 내가 테토녀 70%, 에겐녀 30% 정도로 섞여있는 사람 같다고 했다. 기가 딱히 약하거나 주눅드는 편이 아닌데, 한편으로는 내면이 복잡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이라며. 그런 그도 내 눈에는 테토남과 에겐남의 특징이 6:4 정도로 공존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누구나 두 성별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함께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어쩌면 유형화하여 구분하는 거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닐까.


특히 불편했던 지점은, ‘테토녀’나 ‘에겐남’ 같은 표현이 단순한 유형 구분을 넘어서 때때로 조롱이나 희화화의 뉘앙스로 쓰인다는 점이다.

사무실 이삿날, 박스를 척척 뜯으며 물건을 꺼내던 동료를 보고 누군가 “99% 테토녀네!”라며 웃었다. 장난처럼 던진 말에 모두가 피식 웃고 지나갔지만, 나는 그 장면에 마음속 어딘가가 긁히는 걸 느꼈다. 여성성이든 남성성이든, 본인과 다른 성의 특정 기질이 강하게 드러날 때 그것이 웃음의 소재로 소비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말 한 줄 속엔 '강한 여성성'에 대한 사회의 묘한 거리감이 비쳐 있는 듯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섬세한 남성에게 ‘에겐남’이라는 말이 붙을 때, 그 말은 종종 ‘다정하다’보다는 ‘물렁하다’에 가까운 뉘앙스를 품기도 한다.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고,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는 오래된 공식이, 여전히 언어의 뒷자락에 붙어 우리를 따라다닌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에겐, 테토녀 테스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심리테스트 플랫폼 푸망의 에겐녀 테토녀의 테스트 결과에서는 대장부 같은 여성을 ‘거친 야생의 테토녀‘, ’전생 산적의 테토녀‘, ’두목미 낭낭 테토녀’라 라벨링하고, 이에 해당되는 못생긴 밈을 함께 그려넣었다. 편견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특정 대상을 희화화하는 그 묘사들을 가볍게 지나치기 어려웠다.


또, 테스트의 문항을 보면서도 조금 불편함을 느꼈다. 대체로 ‘간접적이고 조심스러운 의사표현’과 ‘수동적인 성향’은 여성성에, ‘독립성과 주도성’,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남성성에 연결되곤 했다.

이 테스트가 MBTI를 대신해 사람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Z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꽤 복잡한 질문을 안겨준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젠더 이슈에 있어서는 과거의 사고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깊은 생각 없이 이 테스트를 재미 삼아 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놀이처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방식이 무심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대립적 시선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대립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시간에 따라 성격의 비중도 바뀌기 마련이다. 또, 누군가는 따뜻하면서도 강인할 수 있고, 섬세하면서도 능동적일 수 있다.


이번에는 ‘외모’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우리들은 타인에게 ‘여성스럽다’ 또는 ‘남자답다’라는 말을 너무 쉽게 건넨다. 그렇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떨까.

호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독일인 친구 줄리아가 샤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약속 장소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녀를 본 한국인 친구가 너 오늘 참 feminine(여성스럽다)하다는 말을 건네자 줄리아는 말 그대로 헉하며 얼어붙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분명 그 한국인 친구는 친근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의 스타일에 대해 칭찬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일화는 젠더나 외모에 대한 언급 자체가 일부 문화권에서는 금기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수 존 박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미국에서는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유태인들이나 흑인 등이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았던 역사가 있었다.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 현대 사회에서 생긴 것으로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다. 하는 순간 진짜로 돌 맞는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 한국에 와서 살면서 가장 놀랐던 것이 외모 지적, 혹은 외모 칭찬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 사회에도 분명한 함의를 던진다. 우리가 무심코 주고받는 말 속에, 오래된 생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망설였다.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때로는 '페미'라는 비난을 사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말을 아꼈던 적이 많다. 그렇다면 나는 왜 페미라는 말을 듣기 무서운 걸까? 자기검열로부터 오는 무력감이었다. 단지 비판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도, 그것만으로 낙인이 찍히는 분위기 속에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여러 문화권에서 페미니스트는 종종 예민하고 공격적인 여성으로 형상화될 때가 많다. 가끔 페미라는 말은 여성뿐 아니라, 여성 권리를 옹호하는 남성에게도 돌아오곤 한다. 또한, 반대로 남성이 젠더 이슈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질 경우, ‘일베’라는 딱지가 붙기도 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어떤 뚜렷한 구분선이 존재할 때, 그 선을 넘는 행동에 대해서 쉽게 용인하지 않는 듯 보인다.

한편,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동시에 낙인을 피하고 싶어하는 나의 태도는 어딘가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나쁜 페미니스트>를 저술한 록산 게이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꽤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면서도 페미니스트 딱지만은 피하려는 여성, 이 딱지가 붙었을 때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여성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록산 게이는 적극적인 운동을 펼치지는 않더라도,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소극적인 태도를 갖고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자신은 전형적인 페미니스트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기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을 제시해 이를 풀어냈다. 나 역시 완벽하게 깨어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보다는 질문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에 가깝다. 너무 쉽게 그어지는 선들에, 너무 단조롭게 붙는 이름들에, 가끔은 고개를 갸웃거릴 줄은 알고 싶다.

결국 이러한 논의들의 본질은 단순히 여성 권리를 외치거나 성평등을 주장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그어온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려는 태도이고, 사람을 쉽게 구획지으려는 시도에 질문을 던지는 용기다. 모든 사람은 단순한 유형 너머의 복합성과 유연함을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성별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진정한 이해와 포용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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