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사슴의 뿔이 엉킨 자리에서

by 정민

최근 박정민 배우가 추천한 한 권의 시집을 읽었다. 그중 하나의 시가 유독 마음에 걸리고 머릿속에 남았다. 마음 한복판을 조용히 통과해가는 말들이었다. 처음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퍼지는 정서, 무언가를 안고 있는 듯한 슬픔, 그리고 쉽게 말하지 않는 태도. 모두가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시를 곱씹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런 시에 끌리는 내 자신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왜 나는 이런 슬픔을 아름답다고 여겼을까?


아래에 옮긴 이 시를 여러분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읽고 나면 사랑이라는 감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연민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모두가 사슴뿔 모자를 쓰고 있는데」, 문보영


내가 뭐라 뭐라 말했고 애인이 내게 사과 한 알을 쥐여주었다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서의 사과 한 알이 나에게로 왔다

그건 내가 아는 사랑의 형태였고 나는 그가 내게 준 것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슴 두 마리를 소환한다

꽃사슴과 꽃사슴이 서로의 뿔을 들이받으며 싸우는 거야

예전부터 궁금했다 뿔로 몸을 찌르면 한 번에 끝날텐데 왜 뿔로 뿔을 들이받으며 힘겨루기를 하는 걸까?

사실은 죽이고 싶지 않아서야 그런데 사실은 죽이잖아 뿔이 엉켜 하나가 죽어버렸잖아

꽃사슴의 뿔은 죽은 꽃 사슴의 뿔과 엉켜버렸기에 어디 갈 수도 없다

땅만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고 시체가 부드러워져 시체의 얼굴이 몸과 분리된다

꽃사슴은 죽은 꽃 사슴의 머리를 모자 장식처럼 달고 살아간다

군가 사슴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봄이 오면 뿔이 새로 나기에 없던 일이 되고 없던 일이 되기 전까지 꽃사슴은 언 강의 한복판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슬픔을 누린다


그가 이야기를 연민할 때 나는 그의 연민이 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 나를 연민할 때 나는 내가 근사한 마법을 부렸다는 생각에 빠지곤 하는데

이로써 나는 상대보다 한 발짝 늦게 사랑에 빠지고 상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으며

그제야 나는 그를 연민할 수 있게 되고 나 역시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야기를 극복하는 것보다 극복하지 않는 것이 추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며 입구 없는 식당 바깥의 어둠은 굽이치는 치맛자락이 되어 수상하게 지나간다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中 수록)




어느 날 애인이 내 손에 ‘사과’를 쥐여주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이 시. 단순한 과일처럼 보이지만, 시인이 말하는 사과는 ‘미안함’과 ‘용서’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의 사과는 그저 사과가 아니라, 관계를 지탱하려는 작은 시도이자,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어떤 과정이다. 어쩌면 사랑은 늘 그런 순간들로 이어지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주고, 사과를 받고, 그 사과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사랑의 풍경이 꼭 이렇게만 그려져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화롭고 단단한 사랑도 있을 텐데, 왜 나는 연민과 용서를 전제로 한 사랑에 더 마음이 가는 걸까. 아마도 쉽게 오지 않는 이해와 용서, 그 과정을 통과한 관계에 더 깊은 의미를 두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를 넘어서려는 그 마음이, 어쩌면 더 특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시의 중반부에서 등장하는 꽃사슴의 이야기는 잔혹하다. 서로의 뿔을 부딪치며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하나가 쓰러진다. 남은 사슴은 죽은 사슴의 뿔을 모자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고, 그 흔적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동시에 아프다. 사랑 속에서도 우리는 누군가와의 기억을 오래 품고 살아간다. 때로는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만, 그 기억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기도 하다.


꽃사슴의 우화를 화자에게 들려준 ‘그’는 죽은 사랑의 슬픔을 한 번쯤 경험해 본 사람일 것만 같다. 그래서 자존심을 내세워 힘겨루기를 하기보다 누군가를 먼저 품어주는 게 더 옳다는 걸 깨달은 사람. 상대방과 나는 한 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임하는 사람. 표면적이었던 사랑이 서로의 고통을 응시하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순간은 여기에 있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시인은 무엇이 옳은 사랑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보여준다. 슬픔을 누리는 법, 연민을 구성하는 법, 관계를 견디는 법을. 그는 그래서 ‘이야기를 극복하는 것보다 극복하지 않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연민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까, 아니면 사랑을 흉내 낸 어떤 마음일까. 때로는 그를 감싸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사랑은 타인을 향해 뻗는 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는 이야기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는 숭고한 희생처럼 보이지만, 실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러한 연민의 사랑은 위험하다.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를 이해하고 감싸는 나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위험에 더 쉽게 빠지는 것 같다. 서사를 누리는 감각이 몸에 밴 사람은, 슬픔조차도 이야기로 구조화하며 소비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끝난 관계 위에 여운을 남기고, 흉터에 의미를 부여하며, 눈앞의 어둠마저도 치맛자락처럼 우아하게 묘사한다. 파국적인 관계, 깊은 상처, 반복되는 사과와 이해의 제스처들이 때로는 ‘살아 있는 이야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 게 아니라, 이야기 속의 병적인 사랑을 오래 앓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끝내 ‘어둠이 굽이치는 치맛자락처럼 수상하게 지나간다’고 말할 때, 시인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슬픔에 정말 머물러도 되는지. 당신이 이야기를 장악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문 채 겨우 견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록 이러한 고민 지점들을 건너왔어도 나는 이 시가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낀다. 연인이 건네는 사과 한 알, 꽃사슴의 뿔, 언 강 위에서 깨어난 존재, 그리고 어딘가로 스쳐가는 어둠까지. 그것은 우리가 감당해내야 할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며, 이해의 불가능성 앞에서 우리가 끝내 붙들고 싶은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나는 그런 어두운 면들을 외면하지 않게 해주는 문학의 본질을 사랑한다. 문학은 그런 순간들을 조용히 비춰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도, 낯선 사랑의 모습도, 그냥 그 자체로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결국 중요한 건, 이야기를 살아내는 우리의 방식이다. 이해하고, 때로는 웃으며, 다시 걸어나가는 힘 말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지는, 결국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