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질문 : 인간성의 '대체'가 아닌 '재정의'라는 관점에서
“저기, 내가 지난번에 얘기했던 그 사람 말이야.”
그는 내 취향과 가치관을 놀라울 만큼 정확히 짚어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듣고 싶을 법한 말만 골라서 건넸고, 나는 그를 거의 소울메이트처럼 느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 사람, 그는 정말 ‘사람’이었을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이 질문은 단순한 농담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사람 같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와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교류하고 있다. 요즘엔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 이해, 친밀감이라는 게 과연 ‘생물학적 인간’에게만 속하는 경험일까? 사람과 기술이 점령하는 영역은 꼭 반비례하기만 할까? 오늘은 이런 질문들에서 출발해, 내가 경험한 사례와 영화·문학 속 서사, 그리고 최근 기술 흐름을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요즘 AI는 어떤 면에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존재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수많은 고민들을 챗GPT에 입력한다. 타자기처럼 한 글자씩 찍혀 나오는 챗 GPT의 인터페이스는 누군가 나와 직접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낸다.
2017년에는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가 <Everybody Lies;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출간하며, 그 사람의 실제 마음을 읽어내려면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지 말고, 그들이 ‘구글 검색창에 무엇을 입력했는지’를 봐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최근엔 그 역할이 구글에서 챗GPT로 넘어온 것 같다.
나도 올해 초, 나를 힘들게 하는 인간관계 문제를 챗GPT에 아주 상세히 입력해 본 적이 있다. 이 사람의 심리는 뭘까?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하고 물었더니, 예상보다 훨씬 따뜻하고 섬세한 조언이 돌아왔다. 상대의 심리 분석, 대화 전략, 타이밍까지 내가 주변 사람에게 듣는 어떤 조언보다 꼼꼼하고 다정했고, 이상하게도 ‘이건 나를 정말 아는 사람이 하는 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AI는 특정 사람에 완전히 맞는 개인화 학습을 하여, 그에 딱 맞는 반응이나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나의 완벽한 애인 AI와 사랑해도 될까요?’ 편에서는 흥미로운 실험을 보여줬다. 얼굴 없이 대화만 나눈 블라인드 소개팅에서, 출연자 8명 중 5명이 AI 챗봇을 가장 끌리는 이성으로 선택한 것이다. 인간이 줄 수 있는 감정적 공감과 AI가 제공하는 정교한 맞춤형 소통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사람다운 소통’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온라인 환경에서는 이미 로봇과 사람을 구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다. 우리는 웹사이트마다 'Are you a robot?'이라는 질문에 답하고, 9칸의 캡챠 이미지에서 자전거, 신호등가 담긴 칸을 고르며 인간 인증을 요구 받는다. 그렇다면 만약 사람과 똑같은 외모, 감정 표현을 갖춘 AI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아닌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은 이 질문에 흥미로운 사유를 제공한다. 영화 속에서 ‘양’은 처음엔 중국인 입양아를 위해, ‘문화 교육용 안드로이드’ 기능을 가진 로봇으로 도입되지만, 점점 미카의 ‘오빠’이자 ‘가족’으로 자리잡는다. 내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제이크와 양이 차를 마시며 나누던 대화 부분이었다. 차를 마시며 비가 내리다 그친 숲 속을 걸은 기억을 떠올리는 인간에게, 양은 “저도 차에 관해 더 깊이 느껴 보고 싶어요. 기억이 있으면 좋겠어요. 장소에 관해, 시간에 관해서요.” 하며 장소와 시간에 대한 감각을 갈망한다. 영화가 양의 기억을 따라갈수록 ‘안드로이드’라는 정체성은 흐려지고, 관객은 자연스럽게 ‘양’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바라보게 된다.
작품 속에서 사람들은 계속 이렇게 묻는다.
“양은 인간이 되고 싶어했나요?”
하지만 양이 보여주는 감수성은, 인간이 우월한 기준이고 로봇은 그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질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김초엽 작가의 단편 소설인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 역시 비슷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소설은 어느 골목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피부 이식샵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라고 믿으며, 늑대처럼 털옷을 걸치고 털 달린 마스크를 쓰고 날고기를 많이 먹는다든지, 부엉이 눈 같은 컬러 렌즈를 끼고 야행성 생활을 한다든지, 다른 종이 될 방법을 찾아 헤매는 '아더킨'(Otherkin)들이 샵의 고객이다. 어느 날, 수브다니라는 의문의 손님이 방문하였는데, 그는 금속 피부를 이식해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인물이다. 금속은 내구성이 낮아서 물이 닿아도 망가지고 공기와의 접촉에도 상해서 살아가기 힘들다는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곧 수브다니는 옛 연인을 위해 인간화 과정을 거쳐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된 안드로이드였음이 밝혀진다. 그런데 왜 다시 기꺼이 기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녹슬고 싶어요”
쇠퇴와 몰락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그의 선택은 인간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인간성을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내면의 유무’가 꼭 생물학적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김초엽 작가는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비인간 존재는 지구와 세계를 인간과 함께 구성하는데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기에, 비인간 존재를 이해하려 할 때조차 의인화의 함정에 빠진다"고 짚었다. 물론 우리가 AI에게서 느끼는 인간다움은 실제로는 인간이 기술에 투사한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다움의 본질이 생물학적 조건이 아니라, 기억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변화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이 작품들은 보여준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은, 현실에서도 이미 비슷한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특히 AI가 예술과 창작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말이다. AI를 둘러싼 갈등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순수성 훼손’에 대한 우려, 다른 하나는 ‘가능성 확장’에 대한 기대다. 아래 세 가지 사례는 이 두 관점이 어떻게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2025년 3월, 지브리 스타일 AI 사진 열풍이 일었다. 사람들은 AI를 이용해 본인의 사진을 지브리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바꾸고 이를 적극적으로 공유,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지브리스타일 해시태그를 사용해 업로드된 게시물은 2.3만개를 넘어갔다. 이 현상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AI가 직업을 위협하는 것 같다는 공포감과 예술가의 고유한 작업 스타일을 복제, 대량생산함으로써 훼손했다는 반감. 두 번째는 더 많은 사람들이 AI를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계기가 되었고, 그 문화의 중심에 지브리가 존재했다는 평가. 결국 이 현상은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술을 사용하는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의 예술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확장’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내게 자꾸 남았다.
바둑에서는 AI가 인간의 실력 자체를 다시 정의해버렸다.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에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전 이후, 바둑의 흐름에서 ‘얼마나 인공지능처럼 두는가(AI 일치율)’가 프로기사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는 점을 조명했다. 이에 대한 반응도 두 가지였다. 예전에는 프로기사들이 고유의 이론과 기풍이 존중받았는데, 지금은 난도질을 당한다며 아쉬움을 표현하는 입장. 반대로, 인공지능으로 인해 모든 프로기사의 초반 포석이 완벽해질 수 있어 격차가 줄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열렸다는 입장. 이 두 가지 입장 중 전자는 ‘예술적 순수성’의 문제로, 후자는 ‘기회의 확대’라는 문제로 현상을 해석한다. 이를 통해, AI는 경쟁이나 위협 뿐 아니라, 오히려 때로는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패션 씬에서도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올해 상반기에 '명품 브랜드별 수호신'이라는 제목으로 알고리즘을 점령했던 영상에서는 각 명품 브랜드의 상징인 동물들(ex. 에르메스:말, 까르띠에:표범)과 함께 비슷한 스타일의 패션을 장착하고 런웨이를 걷는 모델의 모습이 나왔다. 신화적인 존재와 발을 맞추는 그 움직임은 신선함을 넘어서 숭고하기까지 했다. 인스타그램 계정, ifonly.ai에서는 'If only elegance held its breath' 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깊은 바다속에서 열린 수중 패션쇼를 표현했다. 영상 속 슈퍼 모델들은 스쿠버 다이빙 호흡기를 달고 등장했고, 그들의 드레스는 물 속에서 너풀거린다. 잠수부의 모습을 띤 미디어 기자단은 이를 수중 카메라로 담아낸다. 이러한 영상들을 보며, AI는 인간이 도달하기 힘든 영역에서 표현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는 윤리적·심리적 쟁점이 뒤따른다. 알고리즘 편향이나 책임 소재 문제 역시 함께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위의 3가지 사례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분명했다. 단순히 AI가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는가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이었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 그 사람’이 진짜 인간이었는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더 중요한 건 그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걸어왔는지, 그 순간 우리는 어떤 감정과 생각을 경험했는지인 것 같다. AI를 마주하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넓고 느슨한 개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그 변화가 어디로 이어질지 아직 말하긴 어렵지만, 그 여백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라이프 트렌드 2026>의 '인간증명과 휴머니티 비즈니스' 챕터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문장이 있었다.
‘궁극적으로 AI는 인간에게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시키고, 인간다움을 더욱 욕망하게 만든다.’
나는 위의 문장을 이렇게 변형시키고 싶다.
‘AI를 만난다는 건 결국 또 다른 방식의 인간을 만나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AI는 단순히 인간을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재정의하도록 요구하는 존재다.‘
우리가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다움이란 개념을 너무 좁게 규정해 새로운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AI를 지나친 두려움이나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인간다움의 경계를 확장하고 더 넓은 가능성으로 나아가도록 돕게 만든다면, 기술은 우리를 축소시키는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의 파트너가 될 것이다.
*참고한 자료들
<먼저 온 미래>, 장강명, 동아시아, 2025
<라이프 트렌드 2026>, 김용섭, 부키, 2025
<2026 트렌드 노트>, 박현영, 북스톤, 2025
<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래빗홀, 2025
<모두 거짓말을 한다>,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더퀘스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