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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Aug 25. 2023

위대한 유산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의 슬하에서,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노는 한 마리의 말처럼 자랐다.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네가 알아서 해라’와 ‘너 좋을 대로 해라’였는데, 이처럼 방목형 육아를 하셨던 그들로 인해 한 때는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어머니는 세상 모든 것에 섬세한 사랑을 쏟느라 내게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평생 ‘세상 만인의 어머니’로 존재해왔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필요하다는 말을 가슴 깊이 공감한 것인지, 우리 동네 모든 길고양이들을 10년 넘게 먹여 살리고 있다. 우리 동네에는 총 4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 엄마가 시야에 잡힐 때마다 자기들의 엄마를 마주한 것처럼 저 멀리서부터 총총 걸음으로 달려온다. 분명 우리 가족은 혼신의 힘을 다해 19년 간 젖소 무늬 고양이를, 그 뒤로 3년 간 현재 진행형인 줄무늬 고양이를 양육했다. 그런데도 바깥의 고양이들까지 키우는 심정이 궁금해 물어봤더니, 우리 집 호랭이는 팔자가 상팔자인데 길고양이들은 그렇지 못하니 챙겨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양이들을 사귀는 것으로 모자라, 어느 날 길고양이를 구조하는 분과도 친구가 되어 나타나셨다. 그 이후 종종 음모를 꾸미는 듯한 전화를 하는데 몇 가지 인용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삼색이가 임신했나봐요. 이렇게 추울 때 새끼 낳으면 어쩌죠. 이번 주에 잡아야 되나”

“오늘 줄무늬 2마리 구조한다고 하네요. 10시에 시간 되시면 도와주실래요?”

“사료 좀 배송해드렸습니다~ 16동하고 17동 아이들 잘 부탁드려요~”

짐작하건대 엄마는 언니와 나를 다 키워놓고 허전해, 다시 한 번 육아를 하며 사랑을 쏟고 싶었던 것 같다.


‘만인의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그녀의 커리어에서도 드러났다. 엄마는 대학에서 수십년 간 영어영문학 강의를 해왔는데, 몇 년 전 수업 첫 날에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고 대학생활을 하게 된 바람에 분명 아쉽다고 느끼겠지만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일 거에요. 도전도 많이 해보고 길도 많이 잃어 보세요. 여러분이 앞으로 꿈도, 사랑도, 우정도, 실패도, 여러 가지 감정들도 만나길 바라요”


대학에 겨우 들어갔더니 코로나를 마주해 학생들은 분명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수업다운 수업 뿐만이 아니었다. 새터에 가서 선후배가 눈이 맞고, 수업을 째고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말하자면 평생 꺼내 먹을 추억을 차곡차곡 쌓을 권리였다. 엄마의 말은 그런 상심한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재택 근무를 하던 중 방에서 들려오는 온라인 수업을 몰래 청강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텍스트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강의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지켜보는, 방목형 교육 방식을 여기서도 드러내고 계셨다. 가끔 학생들이 길 잃은 어린 양처럼 헤메고 있을 때에만 개입해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자들은 호호아줌마 같이 포근하고 눈빛이 반짝이는 그녀를 꽤나 좋아하며 분명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그런 엄마의 영향을 받아 나 역시 영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혹자는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 인문학을 폄하하지만, 엄마의 전공을 물려받은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함께 문학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내 생애 가장 확실한 행복 중 하나였음에. 엄마는 대학원에서 셰익스피어를 세부 전공으로 택해, 햄릿의 고뇌와 오셀로의 질투 등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깊이 파고드는 연구를 했다. 반면, 나는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처럼 초현실적인 존재가 나타나는 고딕 문학을 더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많이 관심을 갖고 읽고 보는 장르 역시 SF이고, 신기술과 과학 관련 지식에 열광하는데 이 때부터 그 관심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지나간 것들에 향수를 느껴 과거를 공부하는 엄마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기에 미래를 공부하고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나.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와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이 부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어떻게 다른지 함께 이야기할 수 있고, 앵무새 죽이기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드러나는 성장에 대하여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 엄마는 일생 동안 배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피아노, 외국어, 그림 등 세상 아름다운 것들과의 접점을 계속 늘려나갔고, 그 모습을 보고 자란 나 역시 관심 분야가 다양한 호기심 천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사실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지식 공부’가 아닌 ‘세상 공부’였다.

“세상의 어떠한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라.”

“네가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으면 좋겠다.”

독심술을 쓰시는 건지, 내가 타인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순간마다 이런 말들을 해주셨다.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 서운하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기꺼이 그 사람이 되어봐야 한다는 가르침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엄마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노년의 과제는 꺼져가는 빛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그녀는 젊은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기꺼이 가이드를 자처했고, 그들이 목장 안에서 행복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본 이후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엄마를 보며 배웠다. 매순간의 선택은 나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해야 하며, 그 선택에는 책임이 따름을.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부모가 아이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임을. 그렇기 때문에 엄마를 생각할 때면 미안한 감정이 아닌, 고마운 감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행복한 것이 그녀 역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알기에 나는 매순간 진하게 살게 된다. 내 모든 것이 일생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엄마로부터 뻗어나온 모습이라 생각하면 허투루 살 수가 없다. 나에게 자존감이, 용기가, 따뜻함이, 유연함이 있다면 그건 모두 당신의 것. 이처럼 나는 엄마의 위대한 유산이자, 세컨드 라이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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