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고
몇 년 전 문득 깨달음처럼 찾아왔던 믿음은 어떤 사람의 장점은 ‘장점이자 동시에 곧 단점’이라는 것이었다. 연애로 예를 들어 상상해보자.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중심에 설 줄 아는 사교적인 남자, A가 있다. 당신은 그런 그의 리더십에 반해 그와 교제를 시작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지켜보니 그 사교성은 곧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바람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학을 떼고 헤어진 후, 이번엔 반대로 조용하고 신중한 성향을 가진 남자, B를 만난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진중함이란 장점은 우유부단함이라는 단점이 되기도 했다. 당신은 B와 헤어진 후, 도대체 왜 '중간'은 없는가 하며 연애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반비례 공식은 회사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유능하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집에서는 바로 그 카리스마로 인해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지 못할 수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소통을 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성격의 상사는 여기저기 휘둘려 중심을 못 잡고 팀원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군상이 말해주는 것은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장점과 단점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마음에 드는 나의 특징’이 곧 ‘개선하고 싶은 특징’이다. 그 첫 번째는 '완벽주의'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계획적인 성격은 분명 학업이나 커리어 상의 성장에는 추진력을 달아주는 날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양날의 검은 일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고통을 주는 무기로 발현되기도 했으며, 더 심한 경우엔 상황을 통제하려 드는 이상한 강박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괴로움이 커져 가던 2022년의 어느 날, 베스트셀러 칸에 놓여있던 스웨덴 승려의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마음에 날아와 꽂히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삶을 뜻대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주먹을 쥐고 힘이 들어간 채로 모든 걸 억지로 붙잡으려 하는 게 아니라, 활짝 편 상태로 유연하게 사는 것. 이 얼마나 멋진 메시지이자 비유인가. 이 문장을 읽고 내 본래의 성격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으니 이제부터는 주먹 사이에 탁구공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펴고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최근에는 타협점을 어느 정도 찾은 것 같다.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다방면에서 시뮬레이션 해보고 할 수 있는 것은 시행해보되, 내가 어떻게 해도 통제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는 태도. 이런 마인드로 살아가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말하자면, 주먹에 힘을 뺄 타이밍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장점이자 단점은 '생각이 많은 것'이다. 이는 장점으로 나타날 때 다각적으로 무언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되어주며, 빠릿빠릿하게 남의 생각을 캐치하는 센스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과하게 눈치 보는 성격이 되어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가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쓸데없이 그 이면의 숨은 의도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 했나 하고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메신저를 읽고도 답장이 없거나, 정적이 흐를 때는, 그게 다른 이유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인이라 생각했다. 이 때문에 지쳐서 위로가 필요했던 순간,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승려는 또 다시 현자의 말을 가져다 주었다.
‘마음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거르지 못하고 다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가 되어 수시로 상처받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앞의 문장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믿지는 않는 것’은 남의 시선에 기대지 않는 진정한 자존감을 갖추는 거라고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서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필요할 때는 그걸 믿지 않는 것. 이는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거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집단주의적 문화로 인해 어느 정도 남을 신경 쓰는 것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가. 하지만 중요한 건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되, 그걸로 내가 휘청거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를 지탱할 수 있는 확신의 뼈대를 굳건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분명 내 장점이자 단점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개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런 성격 때문에 나를 사랑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지휘하는 내가 해야 할 일은 평균에 맞춰 개성을 바꾸고 죽이는 게 아니라, 부족한 내면의 어린아이까지 안아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 숲 속의 승려가 쓴 이 책을 읽는 내내 울창한 숲이 눈 앞에 그려졌다. 울창한 숲에서 누군가는 길을 잃고 헤맬 것이며, 또 누군가는 색다른 차원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색할 것이다. 이는 결국 나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수용하는지에 달려있다. 방향을 잘 아는 사람의 삶은 더 쉽고 자유로우니까. 그 숲에서 길을 잃지 않고, 반딧불 같은 따뜻한 빛을 발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맺는 모든 관계 중 단 하나만이 평생 이어집니다.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연민과 온정으로 이루어진, 사소한 실수는 용서하고 또 털어버릴 수 있는 관계라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다정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제 단점에 대해 웃어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거리낌 없이 보살핀다면 또 어떨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 전체가 반드시 좀 더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의 고귀한 마음가짐이 흘러넘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