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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시인 Oct 05. 2024

붉게 핀 고양이 꽃

프롤로그



뙤약볕 내리쬐는 날, 조그만 상자에 들려 어디론가 이동했다. 가린다고 가린 천 사이로 반짝 아름다운 것이 들어온다. 따사롭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작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털을 스치는 미묘한 공기가 다소 텁텁하게 느껴졌다. 문득 불안해져서 틈새 사이로 소리 내었다.


[냥-]


새파란 하늘에 하얀 물체가 뭉게뭉게 모여 있다. 어제 K 씨가 먹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쏙 빼닮아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통 안에 흔들림이 멈추고 가려졌던 천이 걷힌다. 낯선 눈동자들이 파란 하늘을 가려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었다.


[냐앙!]


파란 옷을 걸친 남자가 빤히 쳐다본다. 아등바등 몸짓을 멈추고 가만히 마주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위에서 비춰 시야가 가렸지만, 활짝 웃는 모습이 어디가 허술해 보였다. 그런대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1

낯선 곳에 들어왔다. 오래되어 보이는 미닫이문 너머로 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밝은 빛이 어두워 재빠르게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날 데려온 남자도 따라 들어오려 한다. 하지만 덩치가 커 못 들어오는 걸 보니 꽤나 고소하다.


[어디 갔어 이리 나와 거기 아직 청소 안 했단 말이야-]


다급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골탕을 먹인 듯하다. 안전한 곳이라 생각이 드니 긴장이 풀려 졸음이 몰려왔다. 긴 시간을 이동해서 피곤이 잔뜩 쌓여 있던 터라 살며시 눈을 감았다.    

 

[하얀색 애기야, 완전 솜뭉치 같다니까? 털도 막 뽀송뽀송하게 나서는 바짝 긴장했는지 숨어버렸어......]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이 떠졌다. 바깥에서는 한창 통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어찌나 쉴 새 없이 말하는지 전에 매일같이 찾아와 조잘이던 참새 아저씨를 꼭 닮았다.


[공터에 갔는데 글쎄 덩치가 산 만한 고양이가 막 덤벼들지 뭐야? 요즘은 마땅히 앉아 있을 곳 찾기도 쉽지 않단 말이지, 저번에는 땅에 떨어진 빵 하나 주워 먹으러 가다가 옆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깃털 한 짝 내주고 가까스로 도망 나왔단다.....]

[산이 뭐예요?]

[어휴, 조그마한 것한테 뭘 말하겠니. 그런 게 있어. 아주아주 거대한데 온통 초록색 나무들로 뒤덮여 있단다. 이파리들이 살랑살랑.... 아 이파리가 뭐냐 하면...]


참새 아저씨의 멈추지 않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굉장히 피곤해지긴 해도 밖은 참 넓은 세상이란 생각이 든다. 파란 하늘에 뭉쳐 지나가는 하얀 아이스크림, 저기서 애타게 날 불러대는 덩치 큰 남자 하나가 내가 본 전부이지만 언젠가 나도 하루종일 내가 본 것들을 털어놓을 날이 올 것 같아 괜히 설레었다.     

그러다 보니 캄캄한 여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잔뜩 움츠러든 몸을 펴려니 뻐근함이 느껴져 하품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딸랑이는 방울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내 그 소리가 내 옆으로 휙 다가오더니 쏜살같이 다시 살아지는 것이었다. 소리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조용히 이어지는 침묵에 귀를 기울이니 아까보다 작지만 분명 같은 소리가 이불 너머에 울리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건 아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기척을 감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고개를 낮추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엉덩이를 들어 추진력을 높인다. 이후부터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정확한 타이밍에 놓치지 않고 낚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방울은 이미 내 품 안에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강한 힘에 의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보다 빠른 생물은 처음 만나보는 거라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남자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멀리서 떡진 머리를 흔들며 소란스럽게 웃고 있다. 동그란 안경에 묻은 뿌연 지문이 그를 더 바보 같이 보이게 한다. 방울 소리는 그 뒤로 10번이 넘게 들렸다. 잡았다가도 금세 사라지다가 이내 뒤에서도, 앞에서도 멀리에서도 나타났다. 한참을 뛰다 보니 급격히 피곤함이 몰려와 저절로 눈이 감겼다.


[설화들은 하나의 이야기란다. 이야기 안에는 세상이 있어. 그 세상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단다. 그럼 그 생각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지?]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전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남자는 누군가에게 세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소영이가 말한 것처럼 작가의 살아온 삶이 그 이야기에 담겨 있단다. 어려운 일을 일사불란하게 이겨내는 주인공의 정신이 어쩌면 작가가 가지고 있는 혹 갖고 싶어 하는 이상일 수도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엑스트라조차 고심에 고심을 거쳐야 탄생하는 노력의 산물이거든.]


그가 꼬리를 말고 섰는 나를 곁눈질로 힐끔 보더니 다시 전화를 이어갔다.

[좋아하는 사람, 생각, 불현듯 드는 단어, 새로운 만남들이 그가 써 내려가는 작품 속에 녹아 있기에 작품은 작품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따로 볼 수 없는 거란다. 실제로 작가의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은 작품이 그의 손에서 탄생될 때도 있거든.]


전화를 마친 그가 나를 들어 올리더니 희멀건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설이야 설이 네가 살 집은 여기고 네 이름은 설이야!]


여전히 바보 같은 그의 안경에 따사로운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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